한병철 / 문학과지성사
‘신자유주의 통치술’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심리정치>는 <피로사회>, <투명사회>의 저자로 독일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한병철 교수의 신작이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의 저작이라 신작이랄 수도 없지만 띠지에 인용된 내용을 보자면 그렇다.
‘자기 자신도 모르게 자유를 착취당하고 힐링으로 킬링 되는 현대인들이 읽어야 할 책’이라는 다소 도발적인 언어로 시선을 끌고 있는 이 책은 간결한 어휘 속에 담긴 명료하고도 폐부를 찌르는 촌철살인의 마력이 느껴지는 텍스트다. <피로사회>, <투명사회>를 통해 일찌감치 사회의 모순과 속성에 천착한 저자의 날카로운 시선은 이제 정치까지 그 시야를 확장하여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이 책의 출간 당시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저자의 이력을 들여다보면 독특하다. 고려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하고 독일에서 철학, 독문학, 가톨릭 신학을 공부했다. 독일과 스위스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했고, 독일 카를스루에서 조형예술대학 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다양한 철학적 접근을 통해 사회적 속성을 파헤쳐 가는 저자의 날카로운 심미안은 다소 현학적인 문구조차 유려한 예술적 언어로 직조해 낸다. 독일어로 쓰인 어려운 단어를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역자의 노고가 없었다면 이 책은 전작들처럼 한국에서 그렇게 큰 인기를 구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피로사회>와 <투명사회>를 읽으면서도 실상 텍스트를 어느 정도 이해하는 수준에 다다르지 못했던 것은 그만큼 저작의 수준이 상당하다는 것을 짐작게 한다. <심리정치> 또한 150쪽에 미치지 못하는 적은 분량의 책이긴 하지만 사상과 내용의 무게로 친다면 여느 백과사전 못지않은 깊이와 방대한 정보의 함축된 힘을 느낄 수 있다. 글자의 행간을 읽으면서 그 의미를 찾으려고 긴장하고 애를 썼지만 개략적인 이해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독서 수준에 맞지 않은 책을 골랐다는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한 편, 다소 철학적인 언어와 현학적인 문구의 난립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동안 여태껏 수많은 책을 읽으면서도 미처 느끼지 못했던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던 것은, 그만큼 깊이있는 언어의 향연 속에서 사유하는 즐거움을 만끽했기 때문이다.
자유의 위기
‘자유의 착취’에서 저자는 자유는 결국 에피소드로 끝날 것이라고 단정한다. 신자유주의는 자유 자체를 착취하는 매우 효율적이고 영리한 시스템이라고 정의하는 대목을 보면, 우리가 그토록 신봉해 왔던 서방의 선진국들이 민낯을 숨기고 그들만의 리그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을 속이며 그럴듯한 체제 속에서 안주하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다.
타자의 착취는 그다지 많은 성과를 올리지 못한다. 자유의 착취야말로 최상의 수익을 낳는다.
이 문구는 세상이 더 이상 누군가의 보이는 예속의 울타리에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 포장된 자발적 노예로서의 삶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실체 속에 현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개인의 자유를 통해 실현되는 것은 자본의 자유다. 그리하여 자유로운 개인은 자본의 성기로 전락한다. 개인의 자유는 자본에 “자동적인” 주체성을 부여하며 이로써 자본의 능동적 번식을 추동한다.
자유의 위기 속에서 자본의 독재가 출현하고 투명성의 독재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닌 변질된 자유라는 허울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고전적인 파놉티콘의 울타리보다 더 고도화되고 지능적인 디지털 파놉티콘 건설에 자발적인 자기 조명과 자기 노출을 통해 유지될 수 있다고 진단하는 저자는 이런 현실로 인해 우리 스스로 디지털 파놉티콘의 노예가 된다고 일갈하는 것이다.
스마트 권력
‘스마트 권력’에서는 규율 권력은 비효율적이라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적 권력 기술의 목표는 인간을 온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존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스마트 권력의 속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이 문구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아무런 의심 없이 접하게 되는 수많은 소셜미디어서비스, 이를테면 블로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은 과거의 권력의 모습이었던 명령하고 위협하고 규제하는 권력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여 우리가 보이지 않은 권력 속으로 자연스럽게 침잠되고 있다는 현실을 알려준다.
지배는 그냥 저절로 이루어진다.
어찌 보면 지금 이렇게 도서 리뷰라는 글을 쓰기 위해 모니터를 마주하고 앉아 키보드의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행위조차 스마트 권력의 노예가 되어 그런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간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이미 다국적기업들은 국가 단위의 통제 범위를 뛰어넘어 초법적으로 영역을 확장해 가는 중이다. 이들이 만들어낸 서비스가 지구상에서 수억 명의 인구를 잠식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어려운 일도 아니다.
두더지와 뱀, 생정치, 푸코의 딜레마라는 장에서는 규율사회에 갇혔던 우리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런 한편, 심리정치의 방식이 자기 착취 방식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도 한다.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는 점점 더 세련된 자기 착취의 형식을 고안해 낸다. 수많은 자기 관리 워크숍, 모티베이션 주말 워크숍, 인성 세미나, 멘탈 트레이닝 등이 끝없는 자아 최적화와 효율성 향상을 약속한다.
우리가 일찍이 알고 있었던 자기 계발의 수단들이 자기 착취의 또 다른 방식이었다고 하니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은 인간을 발견하고 그 자체를 착취 대상으로 삼는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는 책이 사회적인 파장을 일으켰던 것은 –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 이런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의 실상을 드러낸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감정의 항상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감성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음모의 영역에 도달한다. 놀이의 영역마저 점령한 게임의 등장은 요즘 트렌드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성과 보상 시스템을 통해 착취를 가능케 하는 신자유주의적 특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벤담의 파놉티콘은 빅데이터라는 그럴싸한 신문물로 대체된다. 감시와 규율사회의 상징적인 파놉티콘이 고도화된 미래의 기술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빅데이터를 새롭게 정의한 이 말은 그런 미래 기술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 명징하게 드러내준다.
총체적인 데이터 지식은 정신의 원점에 놓여있는 절대적 무지에 지나지 않는다.
때론 파편화되기도 하고, 현학적이며 철학적이고 시대를 포괄하고 미래를 지향하기도 하는 한병철의 <심리정치>는 한마디 난해한 책임에 틀림없다. 사전 지식 없이 이 책을 읽는 동안 일종의 궤변적인 언어의 유희에 농락당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가의 심층적인 사유에 경도되어 넋을 잃게 만드는 분명한 마력이 있기도 하다. 난해한 책이니 만치 한두 번의 통독으로도 – 개개인의 차이는 있겠지만 - 그 진정한 의미를 깨치는데 어려움이 있기는 할 터이지만 마치 김훈의 에세이처럼 간결하고 정의된 문체는 매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