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굴의 시대

박노자 / 한겨레출판사

by 정작가


사회나 시대를 규정하는 제목의 책을 접할 때면 사상적인 세례를 경험하게 된다. 한병철의 사회 시리즈가 그렇고, 에릭 홉스봄의 혁명, 자본, 제국의 시대가 그렇다. 에릭 홉스봄의 시대 시리즈는 아직 한 권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역사적인 사상의 궤적을 훑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책들이다.


<비굴의 시대>는 부제가 ‘침몰하는 대한민국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질문 자체가 파격적이다. 침몰하는 대한민국이라니. 하지만 작금의 상황을 보면 이 부제가 그리 어색하지 않다. 위기에 몰린 대한민국을 이처럼 정확하게 표현하기도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 책이 발간될 당시는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사회는 물론 시대에 대한 비판조차도 서슴지 않고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시기에 박노자라는 러시아계 한국인이 규정하는 시대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택해온 대한민국은 그동안 세월을 거쳐 오면서 제대로 된 민주주의나 자본주의를 경험해 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불행한 현실 앞에서 신자유주의 물결은 더욱 자본에 취약한 계층을 힘겨운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자본주의의 폐해는 재벌을 엄호하는 국가시책으로 인해 더욱 확산일로를 걸을 수밖에 없었고, 급기야 며칠 전 우리나라 재벌의 상징인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으로 그 전말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이러한 정경유착의 사슬 속에 얽힌 비위는 사상초유의 게이트 사건을 전 국민적인 관심사로 승격시켰다. <비굴의 시대>에서 다루고 있는 갖가지 자본주의의 문제점들은 사회주의로 체제를 바꾼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이 자본주의의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하는 미래학자들의 예측이 무의미한 전망은 더더욱 아닐 터이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은 다소 과장되고, 편향된 시각으로 바라볼 만한 것들이 많다. 사회주의에 대한 옹호는 이미 역사적으로 경험했던 체제에 대한 실패 사례에 철학적인 대안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론적인 접근은 그저 이상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급진적인 사상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소 그런 주장들도 없지는 않지만 대한민국의 현실을 아프게 꼬집고 있는 대목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제대로 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했던 우리들의 한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굴의 시대>에서는 자본주의 권력의 횡포로 인해 억압받고 있는 다수의 민중들에 대한 가슴 아픈 사연들이 녹아있다. 경쟁을 위주로 재편된 사회에서 부가 대물림되는 계급 사회의 어두운 면을 밝히고 있고, 각계각층에서 벌어지는 갑질 공화국의 면모를 어김없이 드러낸다. 승자독식의 세계와 인문학의 위기, 근본적인 물음이 없는 사회에 대한 비판, 문명사회에서의 은폐된 폭력 등 다루기 다소 껄끄러운 주제들을 과감히 드러내 난도질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위험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온전히 여기에 담긴 저자의 주장을 무조건적인 옹호로 받아들일 때만 가능하다. 다소 급진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이 책이 잘 읽혔던 것은 그동안 우리가 암묵적으로 내세우지 않았던 문제들에 대해 공론화의 장을 마련했다는 의미에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책의 제목처럼 ‘비굴의 시대’를 살고 있다면 그런 시대는 마땅히 청산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침몰하는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질문하는 것이 선결과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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