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이, 후다닥 밥 해 먹다
10월이 끝나갈 무렵 은이는 초대장을 발송했다.
"옷장의 재발견"이라는 제목이 붙은 초대장에 은이는, 심곡파출소 단골손님 "볼 빨간 이수경"을 그렸는데.
늘 입는 베이지색 코트와 휘날리는 스카프는 물론,
살짝 보이는 꽃무늬 원피스와 바닥에 질질 끌리는 커다란 가방, 흙 묻은 하얀 운동화까지.
코믹한 표정의 인물은 몸에 두른 모든 것들에
"바자회에 요거 있음", ""몹시 끌리지유?", "요고요고 가져가세요^^" 하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다.
바자회가 열리는 것이다.
더위가 길어지면서 가을은 뒤늦게 다가왔다.
긴긴 여름 동안 입었던 짧은 옷 대신 드디어 긴팔옷을 꺼내면서 곧 추위가 닥치겠지, 했는데
평소와 달리 기온이 크게 떨어지지 않는 어정쩡한 날들이 지속됐다.
이미 초록을 걷어내고 고운 단풍옷을 갈아입었어야 할 나무들은 우왕좌왕
이파리들이 누렇게 시들어 말라가더니 뚝뚝 떨어져 거리에 쌓였네.
진작부터 가을 바자회 이야기는 나왔으나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해 결정을 못하다가,
수소문 끝에 경영부진으로 막 문을 닫은 카페 자리를 이틀 동안 빌리게 되었다.
지난봄 바자회를 희희낙락 마치고 나서야 사실 그 운영이 얼마나 주먹구구식이었는지 깨달았는데.
딱히 예산이랄 것도 없었고,
참가 예상 인원이나 소요 비용 또한 구체적으로 계획하지 않은 채 그저 호의로, 낙관으로 진행됐던 행사였다.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초보자의 행운이었던 거다.
하지만 이번에는 규모가 커지게 되면서 비용 문제가 대두됐고,
그래서 운영위원들은 약간이나마 경영마인드를 장착해야 했으니.
봄에는 그저 친구들끼리 안 쓰는 물건 재미나게 교환하자, 는 친목적인 의미로 시작된 행사가 기대 이상의 호응을 얻게 되면서 기쁨과 보람은 한가득 얻었는데.
수익금을 기대했던 게 아니라서 얼마라도 흑자가 났을 때는 신기했지만,
그 돈을 어렵게 어렵게 운영해 가는 사회단체에 기부할 때는 적은 액수에 부끄러움이 들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도움이 될 만한 수익을 만들어보자,는 욕심이 생겨서 다들 머리 맞대고 궁리했는데,
책임감이 생기다 보니 잘 될까?, 과연 될까?, 하는 우려와 걱정으로 어깨가 무거워졌네.
그래도, 한번 해보자! 고 의기투합해서 긴 토론 끝에 몇 가지 원칙을 세우고 구체적인 실행 방안에 합의했다.
"친환경"이라는 취지에 맞도록 일회용품 사용은 최소한으로 한다.
빌린 장소에 남아 있는 조리도구와 그릇을 이용하고,
모자란 것은 중고물품과 가성비 있는 제품을 구입해서 사용하다가,
행사가 끝나면 이를 필요로 하는 기관에 기부할 예정이다.
또 여성용 물건 일색이었던 봄 행사와 달리 이번에는 어떤 물건이라도 상태가 좋으면 내놓기로 했으니.
지난 행사에 여자친구를 따라온 남자 손님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로 사줄 수도 있으니까.
훈훈쓰.
그리고 미술 계열 전공자가 대부분인 운영위원들은 행사 장소를 보기에도 좋고 기능적이면서,
천편일률적이지 않고 독특하게 꾸미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라,
때마침 행사 취지가 한 친구에게 예술적 영감을 확 불 질러 버렸으니.
행사장 전체에 걸쳐 판매하는 중고물품들로 "옷장의 재발견"이라는,
제품 진열을 겸한 화사한 창작품을 설치하게 되었다.
오호.
더해서 행사장에 낮게 깔릴 음악까지 세팅 완료.
놀랍쥬?
운영위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지출 내역을 검토한 바,
참가자들이 간단하게 먹을 만한 음료와 간식이 아니라도
이틀 동안 일하는 운영인원들이 먹어야 할 식사 비용만도 적지 않을 거라서.
방안을 고심고심하다가 직접 만들어먹자, 는 결론에 이르렀는데.
사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던 중에
제주도에 가 있는 바리스타 친구가 휴가를 내어 서울에 행차해 바자회의 음료 부문을 지휘하기로 하고.
유럽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날 예정인 어느 선배는,
그동안 우리나라 간편식을 해외에 소개하겠다, 는 목표로 야심 차게 준비해 온 메뉴가 몇 가지 있다 해서
식사 팀을 따로 구성해 선배 지도 하에 음식 연습을 시작했다.
과연 바자회 참가자들은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요?
나라는 시끄러웠다.
숨어있던 또 다른 뒷거래, 모략, 불법과 위법이 꼬리를 드러내면서 매일 보게 되는 권력자의 거짓, 폭력성, 비열함과 천박함은 국민들의 인내심 한계를 훌쩍 넘었다.
경기가 매우 좋지 않아 문 닫는 상점들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취업 시장은 꽁꽁 얼어붙어 앞길이 막막한 후배들은 울상이었다.
아르바이트로 용돈이나 벌던 친구들도 하나둘씩 일자리를 잃었다.
쿠팡이 나아? 마켓컬리가 조금이라도 더 편해?,
하루짜리 막노동이 화제에 오르는 형편.
마냥 웃고 떠들 수 없는 20대의 현실이었다.
암울한 형편에서 각자 고개 돌리고 혼자 한숨을 내쉬는데.
그래도 이번 행사에서 안 쓰는 물건을 나누자, 는 일차적인 취지 외에 얻게 된 또 하나의 의미라면,
우리끼리 서로 돕자- 는 행동을 부분적이나마 시작한 점이다.
봄 행사를 마치고 남은 물품을 기증했던 자립준비 청소년들에게 이번에는 특별히 초대장을 보내서,
행사장에 직접 방문해서 원하는 물건을 고르도록 했다.
그들이 행사장에서 혹시 받을지도 모르는 위화감 같은 정서적인 문제를 다들 우려는 했지만,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서로에게 담을 쌓는 태도는 지양하는 편이 옳다는 데 동의했으니.
관계자 분들과 의논해서 몇몇 어린 친구들을 불렀다.
함께 밥도 먹고 물건을 골라주는 데다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걸그룹 댄스까지 추면서 훈훈한 시간을 보냈다는 후문.
서로의 진심이 서로에게 전해졌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너무나도 예쁜 친구들.
더 이상은 이들에게 인생이 가혹하지 않기를,
고난은 이제 끝나고 앞으로는 훨훨 날아오르기만 기원해.
겨울 물건은 부피가 크고 무게가 나가서 모두모두 고생했다.
물건을 펼치고 치우는 일은 정말 고달팠다.
아, 물건 싫어,
미니멀하게 살기로 일순간 결심함.
운영팀 말고 참가자들도 이 행사를 기필코 성공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에 결코 가벼운 기분이 아니었고.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으니.
그래서 가을 바자회는 봄 행사 때처럼 신나기만 한 시간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서로 나서서 돕고 앞장서서 일거리를 찾아내 무사하게 행사를 마칠 수 있었고.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하며 참가자들 모두가 기뻐했다.
각자의 서랍 안에 갇혀있던 물건들 상당수가 환호성 속에 새 주인을 찾아갔다.
드라이클리닝이 필요한 겨울 외투를 그냥 내놓을 수밖에 없는 비용 문제가 마음에 걸렸지만,
이렇게 좋은 옷을 헐값에 가져가니 세탁 비용은 기꺼이 지불해야지, 하는 구매자의 태도에 안도했지요.
물건이 많이 소화된 만큼 기부액도 꽤 늘었다.
힘들었지만 할 만했던 행사였다.
그러면 만들어 먹기로 한 식사는 성공했을까요?
한국 사람은 밥심이쥬.
그래서 잔뜩 밥을 했다.
하고 또 했다.
엄청 먹어댔다.
위대한 청춘 아닙니까.
먼저 주먹밥을 만들자.
계란, 대파와 고추를 잘게 썰어 밥과 함께 볶은 뒤
다진 마늘을 넣어 짭짤하게 볶은 소고기 소보로와 김가루를 더하고,
마지막에 참기름과 참깨를 뿌렸다.
밥 한 공기씩 분량을 비닐봉지에 넣어 꽁꽁 뭉쳤네.
육식을 하지 않는 친구에게는 소고기 소보로 대신 통조림 참치로 대체.
채식하는 친구에게는 김가루와 채소, 참기름으로 맛을 낸 주먹밥을 제공했다.
불고기 덮밥도 했다.
얇디얇은 우삼겹에 다진 마늘, 다진 파, 다진 고추에 채 썬 양파를 넣어 불고기 양념으로 자작하게 볶았다.
큰 그릇에 밥, 불고기, 계란 지단에 깻잎 채를 담아냈어요.
비벼먹을 양념으로 고추장 넣은 매콤 양념 제공.
사각김밥도 준비는 했다.
음, 그런데 모양 잡기가 쉽지 않네,
서비스하는 시간이 많이 걸려 DIY로 즉석에서 변경.
밥에 계란프라이, 사각 장봉과 깻잎, 김밥김, 고추장 양념을 제공해 각자 싸 먹도록 했더니,
킬킬거리며 즐거워하대요.
재료가 동났다.
모든 메뉴에는 단짠의 멸치볶음과 사각거리는 무말랭이 무침이 반찬으로 제공됐고,
시래기 된장국을 얻어먹은 운 좋은 사람도 있고 냄비가 비어서 못 먹은 사람도 있었다네.
재료들을 이른 아침부터 미리 준비해서 현장에서 즉시 담아주니 맛은 좋았는데.
서비스하는 속도가 먹어치우는 속도를 못 따라가 음식 팀이 상당히 고생했다고 합니다.
식당 운영이 얼마나 어려울지,
밥집 사장님들, 존경합니다,
절로 고백이 나오더라고.
늦었던 가을이 끝나고 추위가 닥쳤다.
모든 일을 마치고 은이는 혼자 여행을 떠났다.
한 달 동안 무거웠던 책임에서 벗어나 홀가분해졌다.
나중에 곰곰이 돌이켜보면 잘 한 일도, 부족한 부분도 있어서 혼자 부끄러워질 수도 있겠는데.
우선은 무게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을 즐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