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이의 후다닥 밥 해 먹기
그날 국회 앞에 모인 사람들은 모처럼 국민들과 정치인들이 뜻을 같이한다는 강한 일체감에 울컥했다.
계엄령이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국회 담을 넘은 국회의원들과
국회를 점령하려는 계엄군을 막아선 시민들의 마음은 하나였으리라.
그들만의 리그에서,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래서 국민을 이용하고 군림하려는 위선자가 아니라.
정정당당한 나라를 만들어달라는 국민의 요구를 받들어 대의에 헌신하기로 약속한 사람들을 국민의 대표로 선택하고,
유심히 그들의 정치 활동을 지켜보며.
올바른 활동은 적극적으로 지지하겠다고 다짐했다.
식민지와 독재정권에서 오늘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이뤄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고 희생됐을까!
책으로만 읽었던 그분들의 절망과,
멸사봉공한 의로운 이들이 겪었을 고초와 외로움을 확실히 체감하는 몇 년을 지나면서,
은이는, 고맙습니다,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우리 사회를 짓누르는 그 더럽고 음침한 어떤 것을 조금이라도 벗겨낸 오늘의 성취가,
아직 갈 길이 까마득한 답답한 이 현실을 단번에 바꿀 수는 없겠지만.
언젠가는 그곳에 이를 수 있다는 희망과 가능성을 믿게 해 주었다.
집에 돌아와 은이는 끙끙 앓았다.
평소 체질로 보아 이 추위에 길에서 무리했으니 감기나 몸살은 충분히 예상했는데.
화상을 입을 줄은 미처 몰랐지.
추위에 대비해 은이와 친구들은 온몸을 둘둘 감고 나가면서
발이 시릴까 털신을 신었고.
두 겹 양말 사이에 핫팩을 붙였다.
걸어서 한강 다리를 건너는 도중 발에 심한 통증을 느꼈지만 신발을 벗어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잖아?
친구들과 늦은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와 양말을 벗었을 때는 이미 아기 주먹만 하게 물집이 부풀어있었다.
친구들도 똑같이 붙였는데, 왜 나만!
콜록콜록 기침에,
줄줄 콧물에,
펄펄 열나고,
욱신욱신 온몸이 쑤시고,
목이 아파서 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발을 움직일 때마다 찌릿찌릿.
몸의 괴로움으로 잠에 깊이 들지 못해서 자꾸 깨고,
낮이라고 해서 정신이 맑아지지는 않았다.
비몽사몽 하다가 비틀비틀 일어나 땀이 밴 잠옷을 갈아입고,
화상 부위를 소독하고 양말을 갈아 신었다.
아무래도 병원에 가야겠다.
나가려면 뭘 좀 먹어야지, 허기진 몸을 일으켜 냉장고를 열었는데.
여의도에 가기 전 이미 친구들과 냉장고를 탈탈 털어 먹었는걸.
냉동실에서 고등어 한쪽을 꺼냈다.
고등어를 씻어서 굵은소금 뿌려 미니오븐에 넣고.
밥이 없으니 비상식량 누룽지를 작은 냄비에 덜어 물을 부어 펄펄 끓였다.
고등어가 익을 때까지 은이는 사과를 하나 깎아먹었고,
냉동실 구석에서 오메기떡 한 개 찾아냈다.
심하게 앓는 동안 입이 깔깔하고 예민해져서 레트로트 식품은 전혀 내키지 않았다.
식재료를 배송받아 냉장고에 정리는 했지만 요리할 힘은 없네.
몸이 아픈 동안 최소한으로 조리하고, 설거지거리도 줄이기 위해 은이가 만들어 먹은 음식은 다음과 같다.
# 삶은 계란- 계란은 한꺼번에 삶았다.
주로 아침에, 채 썬 양파를 깔고 삶은 계란을 잘라 올리브유를 넉넉히 뿌려 먹었다.
# 구운 고기와 해산물
날고기나 생선은 굽는 게 제일 쉬운 조리법이라.
소고기, 돼지고기. 굴비, 갈치, 고등어, 물오징어를 번갈아 구웠다.
프라이팬을 씻는 것도 일이니까 밧드에 종이포일을 깔아 미니오븐을 사용했지.
구워진 고기와 해산물은 참기름과 굵은소금 또는 참기름과 간장의 조합에 찍어서 김치랑 먹었네.
그러다 좀 기운이 생겨서 냉동 대하를 몇 마리 꺼내 손질했다.
프라이팬에 굵은소금을 수북이 깔고 대하를 구웠다.
달달하고 부드러워, 음, 맛있더군.
며칠 지나 몸이 조금 나아져서 채소를 다듬었다.
# 연근, 고구마, 당근 찌기
껍질을 벗겨 납작하게 썬다.
연근과 고구마는 물에 담가 살짝 전분을 빼고.
실리콘 용기에 넣어 전자레인지에 3분 정도 돌리면 살캉하게 익는다.
마요네즈, 레몬즙, 꿀을 섞고 후춧가루를 뿌린 드레싱에 곁들여 먹었다.
찜통에서 수증기로 찌는 편이 맛은 더 있지만
전자레인지가 쉬우니까요.
만두는 기름 없이 오븐에 구웠다.
어묵은 펄펄 끓는 물에 살짝 데쳐서 고추냉이 넣은 간장에 찍어먹었고.
칼집 낸 약단밤도 오븐에 구워 먹었네.
쉽고 간단한,
최소한의 손길만 가는 음식들.
그렇게 일주일쯤이 지나니 조금 기운이 났다.
소고기 불고기를 했다.
전날에 간장, 설탕, 다진 마늘에 매실액, 청주를 넣어 불고기 양념장을 만들어두고.
토요일 저녁, 다진대파와 참기름을 추가해 소고기를 재웠다.
10분 정도.
그리고 프라이팬에 불고기를 바싹 구웠다.
양념장만 있으면 불고기 만들기는 참 쉽다.
은이가 모처럼 불고기를 만들어 갓김치랑 금방 지은 밥으로 배부르게 저녁을 먹은 토요일.
친구들은 대통령의 파면을 촉구하는 광화문 집회에 참가했다.
다른 친구들은 집회를 마치고 집으로 향했고,
한 친구는 남태령으로 갔다.
남쪽에서 출발한 농민들이 몰고 온 트랙터 행렬이 며칠을 걸려 서울로 향했는데.
남태령에서 경찰에게 막혀있다는 거다.
엄연히 법원의 허가를 받아 경찰의 에스코트까지 받으며 서울로 온 행렬인데,
대체 무슨 근거로,
서울에서만?
이 매서운 추위에 농민들은 이유도 모른 채 노상에 갇혀버렸다.
수천 명 경찰은 남태령으로 이어지는 모든 도로를 차단했다.
차벽에 둘러싸여 추위에 덜덜 떠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현장으로 달려간 친구는 시민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다고,
국회의원들도 도착했으니 통행금지가 곧 풀리지 않을까?
희망적인 소식을 전하기도 했지만.
밤이 깊어지도록 달라지는 건 없었다.
기온은 뚝뚝 떨어지고 휴대폰 배터리가 떨어지려 해.
이대로 밤 새야 하나 봐...
하는 전갈에 친구 하나가 남태령으로 가기로 한다.
아버지가 데려다주신대.
담요랑, 뜨거운 물이랑, 핫팩, 보조배터리, 먹을 거 다 들고 갈게.
남태령의 밤은 정말 춥고 암담했지만.
밤새 애태우며 현장 소식을 함께 하는 전국 각지의 시민들이 있었고.
직접 달려가는 사람들로 현장에는 시민들이 계속 늘어났다.
마실 것, 먹을 것, 핫팩, 담요에 일회용 보조배터리 등등 필요한 물건들이 끝없이 도착했다.
한밤중에 온통 가로막힌 도로를 이리저리 돌아서,
또 한참을 짐을 지고 걸어서 기필코 물건을 전달하고야 마는 배달기사님들, 최고!
그리고 따뜻한 버스 안에서 잠시 몸을 녹이시라고 어떤 분이 보내주신 난방버스는 간절한 마음이 만들어 낸 놀라운 창의력이었다.
춤과 노래로 추위를 견디는 흥겨운 밤에 아무도 외롭지 않았다
농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처음 경험하는 시민들의 관심에 기쁘고 놀라서 울먹이는 농민들을 보면서,
그간 우리가 농민들이 처한 어려움에 얼마나 무심했는지 반성했고.
그렇게 연대와 협력으로 마침내 승리해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한강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28시간의 악전고투.
동짓날 밤.
어둠이 가장 깊은 날.
동시에 낮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