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조마조마하지만

은이, 후다닥 밥 해 먹다

by 기차는 달려가고

"화나서 마시는 술은 독이야."

오만상을 찌푸리며 친구가 말한다.

그저께, 그 추운 날 저녁.

작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작업실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는데.

후루룩 면발을 들이켜다가 누가 뉴스를 언급했고,

순간 아, 재수 없어!. 다들 짜증이 나서 소주 한 병을 나눠마셨단다.

울화통이 터지니까 한 잔에도 위가 뒤집히네.

새벽에 극심한 통증이 와서 어제 종일 굶었고.

오늘도 진정이 안 돼서 아무것도 못 먹은 채,

집에 콕 박혀있는 은이에게 들른 친구.


"아프다고 말했으면 진즉에 죽을 끓였을걸."

잘 먹고 집회에 가라고 돼지고기 목살을 듬뿍 넣어 친구가 좋아하는 김치찌개를 끓여놨는데,

친구는 속이 쓰려 도저히 못 먹겠다며 따끈한 보리차만 찔끔찔끔 마신다.

무슨 죽이 좋아, 계란죽? 흑임자죽?

괜찮아. 그냥 밥 두어 숟가락에 물 넣고 끓여줘.

그러면서도 흑임자죽, 그거 어려운 거 아니야? 하네.

내가 쉽게 끓이는 방법이 있어. 모냥은 빠지지만.



조마조마한 날들이다.

희망을 꿈꿀 법한 새해가 되었지만 여전히 지지부진한 시국,

내란이 일어나고 한 달도 훨씬 넘었는데 바뀐 게 없다.

수하들은 수감됐는데 막상 수괴는 관저에서 뻗대며 온갖 거짓말과 해괴한 헛소리를 쉼 없이 뿜어내는 중이다.

그에 호응하여 날뛰는 정말 이상한 무리들.

매일매일 하도 기가 막힌 일들이 펑펑 터지니까

자는 동안 무슨 일이 또 벌어졌을까, 밤에도 자꾸 깨어 휴대폰을 들여다본다.

도무지 일에 집중이 .

내가 일하는 도중에도 저쪽에서는 열심히 나라 망치는 짓을 하고 있겠지, 하는 걱정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모두들 평범한 일상을 잃고 마음이 힘들어서 내란성 불안증, 내란성 스트레스, 내란성 고혈압, 내란성 불면증에 내란성 노화까지,

울화가 치미는 국민의 심정을 가리키는 신조어들이 널리 퍼지고 있다.

지난번 체포 시도가 실패한 이후 이제나저제나 어서 체포되기만 고대하면서,

오늘 체포가 안 됐으니 그럼 "내일인가? 병"까지 유행하고 있으니.

은이는 어젯밤에도 잠 못 이루고 시사 콘텐츠들과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다가 새벽에야 간신히 잠이 들었다.

제발 빨리 잡아가 주세요.

법이 철저히 유린되는 이 현실.


오로지 탐욕으로 똘똘 뭉친,

지위든, 돈이든, 손에 뭐라도 쥔 게 있으면 징그럽게 엉겨 붙는 그 이익 공동체는,

한없이 뻔뻔하고 끈질기면서 노골적이다,.

친구가 말한다.

단두대에 올라간 프랑스 왕도 저렇게까지 찌질하지는 않았겠다.

나랏일 하라는 공적인 자산을, 인원을 자기 이익에, 자기 범죄를 가리는 방패막이로 써먹어.

나라를 운영해야 하는 공무원들이,

나라를 지키라는 군인들이 줄줄이 조직범죄에 가담하고 있어.

21세기에.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가능해?

우리가 두 눈 뜨고 보는 벌건 대낮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건,

보이지 않는 뒤편에서 늘 저런 식이었다는 거지?

예전부터 지금까지 쭈욱.



은이는 배고플 친구에게 먼저 채친 양배추에 삶은 계란을 얹어서 올리브유를 뿌려 준다.

이거 먼저 먹어.

죽 먹는 친구 앞에서 혼자 밥을 먹을 수는 없으니,

은이도 같이 죽을 먹을 요량으로 큰 냄비에 밥을 두 공기 덜어 넣는다.

많다, 싶게 물을 넉넉히 붓고요.

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계속 저어줍니다.

그 사이에 두부를 넓적하게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프라이팬에 들기름을 넣고 약한 불에 올린다.

시간이 해결해 줄 테니 두부는 가만히 두고요.

다시 죽으로 돌아와,

밥알이 물을 충분히 흡수해 냄비에 물기가 자박해지면

소금 조금, 흑임자죽가루를 넉넉히 넣어 죽을 계속 젓는다.

거뭇한 흑임자죽가루가 풀어지면서 하얀 밥알과 골고루 섞인다.

많이 짜지 않은 무 장아찌는 길쭉길쭉 썰어주고요,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두부는 간장과 함께 접시에 담는다.


조금만 줘, 먹어도 괜찮을지 모르겠어, 하며 절집 공양처럼 간소한 밥상을 받은 친구는 죽 한 그릇을 훌떡 떠먹더니,

막혔던 입이 뚫렸네, 뚫렸어, 하면서 더 달라고.

아무 맛도 아닌 것 같은데 계속 먹게 된다면서

어떻게 끓인 거야? 묻는다.

내가 스트레스받으면 속에서 전쟁이 나잖아.

그래서 죽을 자주 끓이거든.

흑임자죽가루라고 흑임자가루랑 찹쌀가루 섞은 걸 팔아.

거기다 물만 부어 끓이면 우리가 아는, 한정식 집에서 애피타이저로 나오는 미음 같은 흑임자죽이 되거든.

그런데 나는 식사로 먹을 때는 쌀을 갈아서 끓인 미음보다 쌀알이 그대로 있는 죽이 좋더라고.

그래서 흰쌀밥에 물을 충분히 붓고 끓기 시작하면 계속 저어,

물기가 잦아들면 흑임자죽가루랑 소금 넣고 저으면서 재료들이 잘 섞이도록 풀어주면서 끓이지.

같은 방법으로 들깻가루 넣고 끓이면 들깨죽이 돼.

먹을 만 하지?

비주얼은 물에 갠 시멘트 같지만.



밥상을 물리고 은이가 타준 따끈한 매실청을 마시면서 친구가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 성공했다는 사람치고 좋게 보이는 인물 아주 적어.

어떤 분야건 높은 자리 차지한 사람 중에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 있더라고.

지금까지는 설마 그래도 내가 모르는 잘난 구석 하나는 있겠지, 했는데.

와, 지금 한자리하는 사람들은 죄다 실력도, 인품도, 윤리도, 심지어는 상식도 완전 꽝이야.

자리에 대한 책임감이 코딱지만큼도 없이,

일하라고 준 권력을 사리사욕에 휘두르는 무뢰한들이야.

실력과 직업적 양심 대신 아부와 협잡과 모략으로 자리까지 간 거였어.

정신 똑바로 박힌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서 배겨 날 도리가 없는 거야.

이런 사회에서 젊은 사람들이 뭘 배울 수 있어?

이렇게 엉망진창인데 아이를 어떻게 낳아?.

바르게 살려는 사람에게는 떼로 몰려들어 인생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는걸.


은이는 지난 몇 년 특히 이 사회 각 분야의 소위 엘리트라는 사람들 상당수가,

그들이 출세하겠다고 야망을 불태웠던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 시대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멈춰서 미라가 된 것도 아니고 시대의 언어와 태도로 그냥 썩어버린 거였다.

본인들 생각이나 판단은 오로지 자기의 이해타산을 따질 때나 잠깐 작동되고.

자신이 맡은 업무마저 그저 높으신 분들의 명령을 따르는 또는 윗사람들 기분에만 맞추는 수족노릇을 뿐.

아무 생각 없이.

고민도, 갈등도, 소신도 없이.

나라야 무너지든 말든,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몰든 말든,

그저 눈앞의 자기 이해관계만 따지는 거였다.

그 이익에 걸림돌이 된다 싶으면 철저히 짓밟지.


세상은 끊임없이 바뀌어가는데,

더 이상 공부도 하지 않고, 생각도 하지 않는 인간은 성장하지 못한다.

성장이 멈춘 사람은 영혼의 피돌기를 그치니 그대로 썩는다.

쉼 없이 흐르는 강에서,

그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수초에 걸리거나,

물이 마른 웅덩이에서 푹푹 썩어가는 물고기-

바로 그런 악취 풍기는 유기물일 뿐.

자신에 대한 정직한 성찰이 없고.

세상을 알아보려는 진지한 노력이 없어,

이 웅덩이 저 웅덩이에 고꾸라져서 본능적인 탐욕으로만 펄떡거린다.

결핍에 사로잡힌,

가져도 가져도 불안하기만 한 불행한 영혼.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있고,

때때로 마음에 깊은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차마 저렇게 사악할 수가 없지.



요새 하는 작업을 이야기하다가도 곧 화제는 진행이 안 되는 체포 문제로 돌아가고.

역사를 돌아볼까, 해서 은이가 읽는 책을 말하다가도 이야기는 다시 내란의 무리로 방향이 바뀐다.

아, 이런 시국 싫다 싫어.

은이가 분위기를 돌린다.

점심 먹은 거 이상 없어?

응, 지금은 속이 편하네.

그럼 더 먹자.

벌떡 일어난 은이는 볼에 찹쌀가루와 김가루를 쏟아붓고,

물을 조금씩 흘려가며 섞는다.

반죽이 되직해지면 한 숟가락씩 떠서 기름을 넣고 달군 팬에 지져내요.

김전, 이라고 스님이 하는 걸 봤거든.

만들어보니까 담백하고 맛있더라고.

그렇게 김전 몇 개를 굽고,

프라이팬을 쓰는 김에 손질해 둔 연근 몇 쪽도 꺼내 노르스름하게 굽는다.

금방 지진 전은 무엇이든 맛있다.

특히 김전은 그 자리에서 먹어야 맛있지 식으면 아무 맛도 못 느낀다.

먹기 시작하니까 계속 사과도 깎아먹고.

달콤한 유자차도 따끈하게 마셨다.

죽 끓이고 남은 흑임자죽가루는 친구 가방에 넣어준다.

집에 가서 끓여 먹어.

뜨거운 보리차도 텀블러에 담아 준다.

날이 너무 추운데 오늘 집회 나온 분들 고생이 많겠다.

온몸에 핫팩을 붙이고,

모자와 목도리로 둘둘 감아 초롱초롱한 눈만 빼꼼 내놓은 친구는,

" 다지러 간다. 바닥을 단단히 다져놔야 좋은 사회라는 구조물을 튼튼하게 올릴 수 있겠지."

힘차게 손을 흔들며 골목을 내려갔다.


은이는 집에 들어와 현장을 중계하는 유튜브를 보면서 설거지를 한다.

광장 한쪽에는 여러분들이 보내준 온갖 간식차들이 줄지어 있고.

간식차마다 길게 줄이 늘어서 있다.

펄럭펄럭 깃발들이 힘차게 나부낀다.

쩌렁쩌렁,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간곡히 외치는 구호는 파란 하늘 높이 높이 올라가,

밝은 빛과 함께 온 세상으로 퍼지네.

keyword
이전 04화동짓날, 깊은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