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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이라는 추상

은이, 후다닥 밥 해 먹다

by 기차는 달려가고

예년보다 한파가 적다고는 하지만 추운 건 매한가지라, 작년보다 가스비가 더 나왔다.

이크.

실내온도를 1도 낮추고 당장 기모바지에 스카프를 두른다.

춥거나 덥거나 하면 어지간해서는 밖에 나가지 않는 은이는,

읽을 책을 쌓아두고,

그림 그릴 준비는 항상 하고 있지만.

하 수상한 이 시국에 마음이 어수선하여

책 읽기에도, 그림 그리기에도 몰두하지 못한다.


참으로 피 말리는 과정을 거쳐 수괴는 구치소로 끌려갔는데

법이나 규칙은 절대 지키지 않는 그 부부는 보는 사람이 되려 부끄러운 별의별 짓들을 다해댄다.

매일매일 벌어지는 어이없는 사건들을 보면서 은이는

부패한 이승만 시절의 정치깡패가 저런 거였구나, 짐작하게 었으니.

공직자들은 직무의 권한을 내란 동조와 비호, 범죄 은닉과 증거 인멸에 사용하고.

공적인 시스템으로 모자라는 부분은 사조직을 동원해 민심을 오도하는 선동에 나섰다.

종교의 탈을 막가파 비즈니스 종사자들은 백주대낮에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맘껏 떠들어대고

법원을 깨부수며 난동을 부렸다.

정치인 암살, 테러를 획책하고.

몰려다니면서 사회불안을 야기하는 소란을 떤다.

이들 때문에 맹렬하게 소진되는 공공 자원.

그럼에도 미온적인 당국의 대처.

누가 내는 세금인데, 이렇게 함부로!

어처구니없는 이런 짓들로 대체 누구의 지지를 이끌어내겠다는 걸까.



추울 때는 무조건 뜨끈뜨끈한 국물 음식이다.

할머니께서는 겨울이면 늘 멸치와 다시마 같은 재료를 풍부하게 넣어 우려낸 해산물 육수나,

소고기를 푹 고아서 만든 고기육수를 준비해 두셨지.

겨울에 먹는 돼지갈비 비지찌개는 얼마나 맛있고,

구수한 시래깃국에 밥 말아서 생선조림이랑 먹으면 또 얼마나 맛있게요.

몹시 추운 날, 학교에서 돌아온 은이 앞에 할머니는 펄펄 끓인 육개장 한 사발을 대령하셨다.

매운 국물에 쭉쭉 찢은 고기랑 고사리 얹어서 한 입 한 입 먹다 보면,

땀이 쭉 흐르면서 얼어있던 몸이 스르르 녹았지.

이제 혼자 먹는 은이의 간소한 밥상에 그런 정성은 없음.

그래도 뜨끈한 국물음식은 먹어야겠으니 재주를 부려볼까.


아침에 따뜻한 이불속에서 빠져나와 써늘한 부엌의 냉기에 몸을 떨면서

어젯밤에 끓여 보온병에 넣어둔 따끈한 보리차를 쭈욱 들이킨다.

정신이 들면 눈곱을 떼고는,

냄비에 물을 받아 인덕션에 올리지.

한우, 사골, 해산물, 채소 뭐 이런 천연재료로 만들었다는 코인 육수를 종류 별로 구비해 둔 은이는,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한 고른다.

코인 육수를 넣은 국물이 끓는 동안 냉동실에 있는 떡국 떡을 꺼내 찬물에 씻고요.

은이는 삶은 계란과 양배추, 양파에 드레싱을 뿌려서 먼저 먹어요.

국물이 끓으면 떡을 넣고.

떡이 말랑해지면 냉동해 두었던 채 썬 표고버섯 한 움큼,

잘게 썬 대파를 넉넉히 넣어주고.

마지막으로 들깻가루 듬뿍 덜어 한소끔 끓이면 은이 식의 들깻가루 떡국 완성!

떡이 푹 무른. 부드러운 떡국을 좋아하는 은이는 수프처럼 걸쭉해진 국물을 홀짝홀짝 떠먹는다.

몸이 따뜻해진다.


소고기 떡국도 끓인다.

한우 코인 육수를 넣어 끓이다가 떡국떡을 넣고 잘게 썬 대파를 넣어요.

버섯은 있으면 넣던가.

떡이 익으면 떡국을 그릇에 덜고 미리 만들어 둔 소고기 소보로와 계란 지단에 김가루까지 얹으면 색감도 예쁜 떡국 한 그릇이 된다.

손이 가더라도 다진 소고기로 소고기 소보로 한통 만들어 두면 떡국에만 아니라 다른 음식에도 쓰임새가 많다.

콩나물 비빔밥이나 계란볶음밥에도.

주먹밥에도, 김밥에도.

잔치국수에도, 비빔국수에도 단짠의 소고기 소보로 한 숟갈 넣으면 음식이 맛있어진다.

다진 돼지고기를 맵싸하게 볶은 매콤 돼지고기 소보로도 다양하게 이용된다.

양배추를 찌거나 깻잎에 쌈을 싸 먹어도 좋고,

반찬으로 주워 먹어도 맛있다.

다진 고기가 아니라 작게 깍둑썰기한 돼지고기도 같은 방식으로 볶는다.

물기가 없어질 때까지 바싹 익혀요.


떡국 끓이는 방법은 또 수제비에도 해당된다.

소금과 기름을 조금 넣어 밀가루를 질게 반죽해 밀폐용기에 담아두면,

코인 육수에 감자, 호박 같은 재료를 추가해서 언제고 쉽게 수제비를 끓여 먹을 수 있다.

같은 반죽으로 호떡도 만든다.

일반적인 호떡 반죽보다 질척한 이 반죽을 한 움큼 떼어내 프라이팬에서 밀전병처럼 얇게 펴서 굽다가.

설탕과 건포도, 견과류를 섞은 소를 뿌려 둘둘 감으면.

호떡인가 밀전병인가 정체는 모호하지만.

어쨌든 맛은 참 조커든요~



설날이 다가온다.

이번 설에는 외할머니께서 병원 밖으로 나오지 못하시게 됐다.

많이 쇠약해지신 데다 독감이 유행이라.

가족이 함께 전에 병원으로 외할머니를 찾아가 면회만 한다.

차례도 지내지 않는다 해서 외할머니 병문안을 마치면 모두 외할아버지 산소에 가기로 했다.

이모가 외할머니 드릴 음식을 준비하셨는데 은이도 두 가지 반찬을 준비했다.

소고기를 잘게 다져 넣은 약고추장은 언제 먹어도 맛있지.

완성된 약고추장을 병에 담고 팬에 눌어붙은 약고추장에 밥을 비벼먹었네.

내가 만들었지만 어쩜 이렇게 맛있다니.

헤헤...


친가도 차례가 없다.

할머니 병세가 악화되면서 갓 결혼한 아들네 힘들다며 큰집에서는 할아버지 기제사도 그만두셨거든.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일에 은이는 혼자 간소한 제사상을 차려왔다.

이번 설날 아침에도 은이는 갈비찜을 만들고,

고기로 육수를 내고 고기 완자를 얹은 떡국으로 차례상을 차렸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저는 잘 지내요.

슬픔도, 아픔도 없는 하늘나라에서 한없이 평화롭고 행복하게만 지내셔야 해요.

저는 올 한 해, 힘껏 살아보겠습니다.



명절 즈음이면 은이 기분이 가라앉는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생각하게 되고,

함께 한 기억은 없지만 자신을 낳아주신 부모님을 특히 떠올리게 되니까.

양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이루어내신 삶을 돌아보면서 이번 설에 은이는 '집안'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했다.

양가 모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들도 병으로 자리에 누우시면서,

은이는 집안이 무너졌다, 는 느낌을 받았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사랑하여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낳아 키우는 긴 시간.

자신의 성향과 가치관으로 서로 조화하고 또 갈등하면서.

외부 환경과 이에 대응하는 내부의 반응과 변용이라는 참으로 아픈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치면서.

엄청난 노고와 마음을 쏟으며 밥을 벌고 밥을 짓는 그 고된 시간을 살아내는 시간의 흐름에

모든 가정은 특유의 분위기를 갖게 된다.

은이가 보기에 양가 모두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행하고 이룬 가치는 참으로 바르고 깊어서,

은이는 이분들을 닮고 싶었고.

이분들이 이룬 '집안'의 자손이어서 정말 좋았다.

'집안'의 분위기는 마치 튼튼한 건물처럼 자손 대대로 이어지는 줄 알았어.

자식들이 공들여 지켜내지 않는다면 치열하게 이루어 온 그분들 삶의 내용은,

마치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지는 줄 몰랐다.


외삼촌과 이모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결은 비슷하다.

성품도, 가치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삶이 큰 산이라면 외삼촌과 이모의 현재는 동네 언덕이랄까.

착하고 반듯한데 다소 나약한 느낌이 있다.

아직까지는.

또 외숙모는 외할머니가 아니고,

이모부 또한 외할아버지가 아니기에 그분들이 이루어가는 '집안'은 예전의 외갓집과 상당히 다르다.


친가의 경우는 많이 안타깝다.

큰아버지나 고모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가치관도 다르고 언행도 한참 떨어진 데다 됨됨이는 참 엇나간다.

할아버지께서는 자식들이 부모 좋은 점은 닮지 않고 배우려고도 않으면서,

부모덕 보고 부모 이름만 팔아먹는다고 많이 속상해하셨지.

할머니도 두 자식 때문에 종종 한숨을 내쉬며,

자식은 겉을 낳지 속을 낳지 않는다더라, 하셨다.

어린 은이도 덩달아 심란한 기분이 되어서

나는 멋대가리 없는 큰아버지나 신경질쟁이 고모 같은 사람은 절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조부모들의 죽음과 함께 그분들이 평생 이루어내신 견실한 '집안'은 소멸됐다.

매일매일 정성껏 이루어지던 밥상, 청소, 다림질의 일상에 담긴 사랑과 보살핌의 마음.

그분들이 힘들여 지켜온 정직함과 정중함과 절제와 숙고의 태도.

가족에 대한 헌신과 세상에 대한 책임감.

그분들의 삶이 끝나면서 '집안'의 영역은 무너지고,

아름답던 그 내용은 소실되었다.

은이 혼자 그리워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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