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이, 후다닥 밥 해 먹다
이모님 댁에 다녀왔다.
이모부 생신이었거든.
생일이라 해서 별다르게 여기시는 분들은 아닌데
올해는 이모부께서 정년퇴직이시라...
지금은 간절한 마음으로 나라 위해 기도할 때지 잔치는 가당치 않다는 이모부께,
가족들이 모여 밥이라도 같이 먹자고 자식들이 아버지를 설득했다.
자식인 이종사촌 언니네 가족과 해외에 있는 이종사촌 오빠, 처남인 은이의 외삼촌 가족과 이모부의 형제분들 가족까지,
수십 명이 이모 집에 차례차례 도착해 밥상 앞에 앉았는데.
쑥스럽다 하시면서도 이모부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생신상은 풍성했다.
열성적인 이모가 밤새워 요리한 밥상에는 솜씨 좋은 고기와 채소 요리에 더해 남쪽 바다의 다양한 해산물 요리가 푸짐하게 올라와서,
서울 손님들은 희희낙락, 마음껏 산해진미를 즐겼지.
이모부 형님께서는 주인공인 동생에게
인생은 너처럼 살아야 해,
매일 이렇게 맛있는 밥을 먹다니, 막막 부럽다 하심.
부인 앞에서 이런 무엄한 발언이라니.
이모가 얼른 화제를 돌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새댁이 어린 남매 데리고 남편 직장 따라 낯선 곳에 왔던 삼십여 년 전을 떠올리셨다.
아이들은 어리고 살림솜씨도 부족해서 암담했는데,
여기는 워낙 먹을 것이 풍부하고 음식이 맛있어서 빨리 적응할 수 있었어.
어느새 세월이 이리 흘렀구나.
생신 모임을 마치고 시간 있는 분들은 주변 관광도 하다가
서울로 돌아가셨다.
온 김에 이모부 정년퇴임식까지 참석하기로 한 은이는 일주일 정도 시간이 있으니,
그동안 남쪽 바닷가 지역을 혼자 여행하기로 계획했다.
이모네에 방 하나를 차지하고 당일 또는 하룻밤, 이틀밤 정도의 짧은 일정으로 이곳저곳 왔다 갔다 하는 여행.
서울 사람들이 비행기 타고 제주도는 쉽게 가지만,
되려 육지 남쪽은 여행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온 김에 궁금했던 곳들, 다 가보겠어!
시작은 순천만국가정원이었다.
바다 바람이 차갑게 불어오기는 했지만 하늘이 푸르고 맑아서 넓디넓은 정원을 한없이 걸어 다녔다.
겨울 끄트머리라 꽃은 별로 없었지만 그윽하면서도 정다운 정취가 어디 가나.
예전에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랑 같이 왔을 때보다 시설이 늘어나고 나무들도 무성하게 자랐다는 느낌이 들었다.
얼마나 걸었는지 몰라.
다시 올 때까지 이 아름다운 풍경을 실컷 봐두자.
땅과 물이 경계를 주고받는 습지에는 사람 키를 넘기는 갈대밭이 끝없이 펼쳐지는데,
꽤나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갈대밭으로 들어갔어도 보이다 말다,
누런 풀 숲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다, 하네.
아침에는 숙소 근처 동천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조용하게 볕이 내리쬐는 둑길을 드문드문 사람이 오가는데,
나지막하게 흐르는 반짝이는 물길이 얼마나 평화로운지,
발길을 멈추고 그 평온함을 깊숙이 들이마셨어.
템플스테이도 했다.
캄캄한 새벽, 동트기 전에 절집에 있어보고 싶다는 오랜 소망이 있었거든.
절로 향하는 굽이굽이, 호젓한 길을 지나
담당자 분과 함께 절을 둘러보면서 절집의 구조와 불교에 관한 간략한 설명을 들었다.
스님과 차를 마시며 덕담을 들은 뒤 합장으로 인사하고 은이는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갔지.
뜨끈뜨끈한 온돌방에 정갈한 밥상.
밥 먹고 누웠다가 꼬르륵 잠이 들었네.
해가 지고 나면 산사는 한없는 고요에 빠진다.
그렇게 깊고 깊은, 빛 하나 없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미명을 깨우는 둥둥 북소리가 절집에 울려 퍼지지.
대충 외투를 걸치고 들어선 법당 마룻바닥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발이 닿자 몸이 움찔거릴 정도로 추웠다.
새벽 공기를 가르는 스님의 불경 소리는 낭랑하고,
탁 탁 탁 탁 목탁 소리,
부처님 앞을 조용히 흘러가는 향의 연기.
새벽 예불을 마치고 조금은 청정한 마음이 되어,
어둠 속을 더듬어 찾아간 공양간에서 은이는 뜨끈한 미역국을 먹었다.
춥지만 방에 들어가지 않고 빗질 자국이 선명한 흙마당을 서성이다가.
마침내 날이 밝아오면서 크고 둥실한 산과
산에 안긴 절집이 환하게 떠오르더군.
모든 풍경이 좋았다.
마음 깊숙이 담았어.
네 량짜리 느릿한 기차를 타고 작은 역에 내렸다.
역 주변 상점가는 5분 걸음을 채 못 넘기는가, 싶었는데.
오랫동안 사람들이 살아온 읍내에는 허리 굽은 노인만 몇 분 오갈 뿐 거리는 한산했다.
역 앞에 줄지어 선 가게마다 그물주머니에 담긴 꼬막과 석화가 무더기로 쌓여있더라.
이 가게 물건이나 저 가게 상품이나 다 같아 보였지만,
그래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은이는 싹싹한 아주머니가 주인인 가게에서 꼬막 한 주머니를 샀지.
얼음팩을 채운 스티로폼 상자에 담아,
낑낑, 이모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올라탔네.
등에 맨 배낭에는 이미 순천에서 산 곱창김 두 속이 담겨있는데.
은이도 사들이고, 매일매일 이모도 사들여서 하루 종일 먹어대는 이 지역 특산물로 살이 통통하게 오를 지경인데.
이모부 퇴임식을 마치고 은이가 서울로 향할 때 이모께서는,
두고두고 먹으라며 먹을 것을 또 한 보따리 챙겨주신다.
꼬막은 평생 먹은 것보다 이번에 더 많이 먹은 기분인데,
(쟁반에 찐 꼬막을 쌓아놓고 까먹었음- 반찬 아니고 간식으로요^^)
이모가 무쳐주신 꼬막무침 한 통을 가져왔다.
이모네 가족이랑 우르르, 연포탕 먹으러 갔던 목포에서 사 온 낙지젓도 가방에 넣고요.
은이가 순천에서 산 곱창김 두 속 중 한 속은 이종사촌언니에게 주고 한 속은 은이가 챙겼어요.
(얼마나 좋아하는 곱창김인데요)
보성에서 녹차,
고흥에서는 유자차,
완도의 미역도.
장흥에서 온 표고버섯도 한아름.
살이 쫀쫀한 영광 굴비와 고흥 시장에서 산 숯불 구이 갑오징어는,
냉동실에 두었다가 얼음팩으로 잘 싸서 스티로폼 상자에 넣었다.
아, 꽝꽝 얼린 모시잎송편도 잔뜩 넣었지.
은이가 좋아하는 군산의 울외장아찌도 빼놓지 않았다.
그렇게 먹을 것을 이고 지고,
곧 봄이 올 듯 푹하던 남쪽의 이모 집을 떠나 서울로 돌아왔다.
겨울이 물러가지 않은 스산한 날씨에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평온한 일상을 반납하고 추운 거리에 나서는데.
책임감이라고는 1도 없는 철면피 공직자들은 오늘도 국민이 낸 세금을 랄랄랄 축내면서 자기 살 길만 열나게 찾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은이는 매일 세끼를,
조선 팔도에서 특산품을 진상받던 임금님 수라상 같은 밥상을 차렸다.
언제나 맛있는 밥을 먹지만, 특히나 더요.
은이가 곱창김을 먹는 방법은 이러하다.
냉동실에서 곱창김 두 장을 꺼낸다.
(다른 곱창김보다 길이가 길다.)
약한 불에서 달궈진 프라이팬에 기름 없이 곱창김을 슬쩍 굽는다- 까만 김에 녹색이 감돌 정도로 만.
혼합곡을 조금 두고 지은 쌀밥은 반드시 따끈따끈해야 한다.
손바닥만 하게 자른 김에 밥은 조금 얹는다.
다른 반찬은 곱창김 고유의 맛을 가리므로 밥만 김에 싸 먹는데,
중간중간 울외장아찌를 한 입씩 먹어준다.
- 참 쉽죠?
탱탱한 굴비는 굽기만 해도 맛있는데,
맑게 지지면 또 다르게 맛있어요.
간간한 소금물에 무나 감자, 고추, 대파, 양파 같은 채소에 다진 마늘 넣고 굴비랑 끓이면 끝.
표고버섯은 여러 요리에 곁들여도 좋고,
그냥 팬에 구워서 참기름, 간장을 찍어 먹어도 맛있지만,
살짝 쪄서 들기름과 갖은양념에 심심하게 무쳐도 맛있답니다.
모두 재빨리 해 먹을 수 있는 손쉬운 조리방법들.
밥은 이리 맛있게 먹는데 시국은 자꾸 꼬여만 가네.
온갖 요란을 떨며 구치소에 있던 내란수괴는 잔뜩 허세를 떨면서 공식적으로 탈옥했다.
어이상실.
벌써 끝났어야 할 탄핵 판결은 이번 주에는 끝나겠지?, 와 오늘도 안 됐으면 다음 주에는 꼭 선고가 이루어지겠지?, 하는 답답한 와중에 이런 터무니없는 짓까지 서슴지 않는 저들의 막무가내 행태라니.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사람들은 비장한 심정으로 추운 거리에서 뜻을 표현할밖에.
이모부 퇴임식은 참 화기애애했었다.
의례적인 형식이 아니라 남는 사람들과 떠나는 사람이 서로서로 진심 어린 호의를 주고받는 자리였지.
그간의 고마움과 헤어지는 섭섭함과 앞날에 대한 축원이 끝없이 오가면서
이모부는 함께 일한 동료와 선후배들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셨고.
가족, 특히 아내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고 깊은 고마움을 품고 있다며 잠시 말을 잇지 못하셨다.
마이크를 잡은 공식적인 축사를 통해서도,
공식 행사가 끝나고 다과를 나누는 자리에서도 거의 모든 참석자들은,
그동안 이모가 정성으로 차려주신 수많은 밥상을 이야기하며 고마움을 전했는데.
이모부께서 집으로 끌고 온 손님들이 이모의 밥상에서 정말 맛있게 밥을 드실 때,
이모부가 얼마나 아내를 자랑스러워하셨을지,
뿌듯해하셨을 그 표정이 상상되어 은이는 킥킥 웃음이 낫다.
생신 날 딱 그러셨거든.
그날 이모부께서는 삶의 고난과 시련에 대해서
평상시의 자잘한 균열이 한꺼번에 드러났다거나,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부족함 때문이거나,
서로 간 생각과 입장의 다름, 같은 여러 이유를 지적하시면서.
때때로 찾아오는 고난은 인간의 숙명이 아닌가, 싶다는 소회를 밝히시고.
인생이 꽃길이기를 바라지 말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자신을 잘 지켜내도록 평소에 힘을 길러야 한다는 점.
고통 또한 우리 삶의 소중한 부분이니 괴로움에 매몰되지 말고,
삶의 지평을 넓히고,
인간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도록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라 말씀하셨다.
또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우리는 개인이면서 동시에 공적인 측면을 갖는데
특히 이 사회의 어떤 직무이든 모든 일자리에는 공공성과
자리가 담고 있는 고유의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시면서.
개인적인 욕구와 직무가 충돌하고 갈등할 때,
그 자리가 갖는 본연의 업무를 떠올리면 나아갈 길이 보일 것이라 조언하시면서.
최소한 직무의 공공성까지 사사로운 수익 도구로 만들어버리는 못난 짓은 하지 말자, 고 고별사를 마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