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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내일을 향해 간다

은이, 후다닥 밥 해 먹다

by 기차는 달려가고

인간의 역사는 과연 진보해 온 걸까요?

19세기 유럽에 관한 책을 읽다가 할아버지께 여쭌 적이 있었다.

글쎄.

네가 읽는 그 책의 시대에는 인간의 이성으로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서,

언젠가는 이상적인 세계에 이를 수 있다고 확신했다지.

18, 19세기 서구에서 과학과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이를 기반으로 산업이 발달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민주주의 체제도 한걸음 한걸음 진전되었고.

그럼에도 그 시대 산업과 사회 발전의 혜택을 본 사람들은 전 세계 인구 중 극히 일부분.

넓은 바다 위를 떠도는 나무 이파리 하나만큼이나 됐을까.

물질적으로 융성해서 도시는 나날이 화려해졌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열악한 환경에서 하루하루 살아남기에 급급했대.

제국주의 나라들한테 지배받았던 식민지 현실은 훨씬 더 가혹하고 비참했다.


우리나라는 불과 수십 년 사이에 기아와 독재에서 벗어나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놀라운 성과를 얻었어.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가 발전하는 동시에 또 다른 문제들이 계속 누적되고 있구나.

사람들은 종종 실망스럽고.

공공성을 지켜야 할 언론, 검찰, 사법부, 정치인, 고위 관료들에 재계나 여러 전문집단들까지,

지독하게 이기적인 태도와 부도덕한 가치관이 심각해.

오직 지위와 부유함만 갈망하는 것으로 보인다.



황사가 날아든다.

걸레질을 하니 누런 흙먼지가 묻어 나왔다.

낮기온이 20도를 넘는 더운 날씨가 이어지다가 갑자기 10도 이하로 떨어지고,

대설주의보가 내리거나 강풍이 불거나 하는 참 이상한 날씨.

조마조마한 시국에 온통 정신이 쏠려 봄이 오는 줄도 몰랐는데,

길에 나가보니 노란 개나리가 활짝 피었네.

검게 메마른 나무줄기에 물이 오르고 작은 순이 연둣빛 고개를 내밀었다.


은이는 이모 댁에 있을 때부터 과식하기 시작해서 매일매일 신나게 먹어대더니 결국 탈이 나고 말았.

은이 신체는 음식물도, 스트레스도, 일도, 사람도, 정서적인 자극도 소화할 수 있는 용량이 아주 적어서,

조금이라도 선을 넘으면 반드시 빽빽, 문제를 일으킨다.

외가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유난스러운 체질을 한탄했더니 어른들 말씀이,

신체 스스로 이쯤에서 절제하라는 경고시스템을 발동하다니 오히려 신통한 거라고.

몸도, 마음도, 무리하지 말고 느긋하게 살아가라는 뜻이라고 해석해 주시네.

음, 그런가?


어쨌거나 4월.

길고도 길었던 다사다난한 겨울이 물러가는 추세라 한겨울 옷을 정리한다.

외투들은 세탁소에 맡기고 겨울 옷을 모두 빨았다.

기온이 떨어져도 더는 안 입을 거임.

얇은 봄옷을 꺼냈다.

지겨운 이 겨울을 어서 탈출하자.

옷을 정리하고 청소까지 마치고 부엌으로 나간다.

항상 물건을 꺼내 쓰면 곧 제자리에 둔다고 생각하는데,

옷장도 그렇고 부엌도 그렇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정렬이 흐트러져 버린다.

때마다 정리정돈을 하지 않으면 집은 금세 어질러지지.

환기하려고 집안의 창문을 모두 여니까 차갑지 않은 기분 좋은 봄바람이 집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저녁을 준비한다.

오늘도 잘 먹을 거야.

이제는 몸이 편안해진 데다 기운도 내야 하거든.

두릅을 사 왔다.

냉장고에서 소고기와 표고버섯을 꺼낸다.

두릅은 줄기에 붙어있는 비늘 같은 껍질을 떼어내고 밑동을 잘라 흐르는 물에 씻어요.

작은 냄비에 물을 끓이다가 소금을 조금 넣고 두릅을 뿌리부터 데쳐내지.

찬물에 헹구니 연둣빛 고운 색깔이 되살아난 두릅.

고추장 한 숟가락 떠서 레몬즙과 설탕을 넣어 휘휘 젓는다.

두릅 찍어먹을 초고추장 완성.


소고기와 표고버섯은 볶을 거예요.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소고기를 항상 만들어 두는 불고기 양념에 살짝 밑간 해요.

조물조물 양념에 무친 고기는 옆으로 밀어 두고.

팬을 달궈서 기름을 두르고 통마늘을 볶는다.

마늘이 어느 정도 구워지면 재운 소고기를 넣어 같이 볶다가,

느끼함을 잡아주라고 어슷 썬 매운 고추 한 줌 하면서 불고기 양념을 조금씩 넣어가며 볶아요.

고기가 얼추 익으면 편으로 썬 표고버섯을 듬뿍 넣어 자작했던 물기가 재료에 스며들 때까지,

재료들을 잘 섞으면서 익힙니다.

마지막으로 휘리릭 참기름을 두르고 불을 다.

배추김치, 두릅과 초고추장, 소고기 버섯볶음에

따끈한 밥과 맑은 콩나물국으로 저녁밥상을 차리네.

쉽게 후다닥 만든 음식들인데 차려놓으니 근사한 밥상.



내일 헌법재판소 판결이 있다.

전문가들은 판사 전원일치로 대통령 파면을 예측한다.

마땅히 그래야지.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결정의 순간을 미루면서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었다.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비겁했다, 는 평가를 피할 수는 없지.

그래서 시민들은 법리적으로는 파면을 확신하면서도 헌법재판소 결정에 일말의 불안감이 있는 거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올바른 판결을 기원하며 도로를 꽉 메우고 있다.

노상에서 밤을 지새우고 판결 순간까지 함께 한단다.

마음으로는 은이도 그 자리에 있고 싶지만.

축구를 보면 꼭 지더라, 는 징크스가 있으니.

헌법재판소 판결 생중계도 보지 않고 파면이 확정될 때까지 애써 뉴스를 피할 생각이다.


은이는 저녁을 먹으면서 유튜브로 집회 광경을 본다.

사람들이 정말 많이 모여있다.

반짝반짝, 어둠을 수놓은 응원봉들의 작은 불빛들을 보면서

지난 네 달을 돌이켜보면.

길에서 추운 겨울을 보낸 시민들은 이 나라에 정의를 세우고 민주주의를 지켜온 영웅들의 맥을 이었다.

여의도에서 맞은 탄핵안 통과의 순간.

혹한의 남태령,

함박눈 속 키세스 군단이 탄생한 한남동과.

안국역에서 경복궁역까지 가득 메운 주말 집회에서 없이 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선결제 문화가 탄생했으며,

국내외 많은 사람들이 용돈을 아껴 난방버스를 보냈고.

푸드트럭에, 커피차에, 각종 간식과 핫팩과 필요한 용품을 서로 나누고.

뜻을 같이 하는 낯선 이에게 기꺼이 잠자리와 쉼터, 화장실을 제공했으며.

멀리서부터 부담스러운 시간과 교통비와 비용을 지출하면서도 주말마다 서울 집회에 왔다가 밤차로 돌아가는 고된 일정을 감행한 참가자들이 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젊은 부부,

숙제를 싸들고 온 청소년들과 혼자 또는 친구들과 집회에 자리한 청년들은,

그 못지않게 많았던 은발의 참가자들은,

평소에는 마주치지 않았던 사회 각 분야 사람들이 하는 각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눈이 펑펑 쏟아져도,

강풍이 몰아쳐도,

주룩주룩 빗물이 몸을 적셔도.

발랄한 춤과 신나는 노래로 그 혹독한 겨울 날씨를 길에서 견디면서

오직 나라가 다시 올바른 길에 들어서기를 외쳤고.

각양각색의 응원봉들은 반딧불이처럼 작은 빛을 발했다.

크고 작은 해학을 담은 표어들과 펄럭이는 깃발들은 성난 파도처럼 거리를 흔들었으니.

이토록 멋진 시민들.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만 줄줄 늘어놓는 비루한 고위 관료들은,

추접스러운 군 장성들은,

정치 깡패와 동무 먹은 어느 당 무뢰한들은,

검찰이라는 이름표를 걸고 조작과 불법을 밥먹듯이 해대는 저 악랄한 패거리는,

힘 앞에서는 납작 무릎을 꿇고

국민한테는 거들먹거릴 줄이나 알지.

윤리도, 도덕도, 업무 능력도, 판단력도, 상식도, 책임감도 전혀 없는 아첨과 협잡의 달인들이었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오직 돈에만 환장했던 선대와는 조금이라도 다르겠지-믿고 싶었던 2세, 3세 재벌총수들은, 겉모습은 조상들보다 번지르르했지만.

사실은 동네 양아치한테 목줄 꿰인 약점 많은 처지라서.

대통령이라는 작자 뒤를 질질 끌려다니면서 시장통에서 떡볶이나 얻어먹더라.

억!

저런 수준이었어?


너무 후지잖아요.

아무리 내가 재벌이요, 난 권력층이요, 엘리트라고 빡빡 우겨댄들,

너무 후져요.

그냥 인간이 후진 거예요.

그런 실력으로 이토록 멋진 국민들을 어떻게 이기겠어요?

언제까지 국민들을 속이면서 그 더러운 거래를 계속하겠나구요.



그날 할아버지, 은이에게 이어서 말씀하시길,

역사를 돌아보면 대중의 에너지가 폭발하고 사회가 번영하면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시기가 있고.

전횡을 일삼는 나쁜 권력의 손아귀에 쥐락펴락,

백성들이 속수무책 짓눌리는 시기가 있었다.

사악한 권력의 암담한 시대에 숨죽이고 마지못해 살아가다가

홀연히 한 사람 나타나 이건 잘못이요, 당당하게 외치지.

얼마 안 가 그 사람은 못된 권력에 의해 처참한 죽임을 당하겠지만.

이들 순교자의 저항이 당장은 실패한 듯 보이겠지만.

의롭고 용감한 이들의 올바른 행동은,

힘없는 한 사람, 유약한 개인마다 마음속에 숨어있던 올바름에 대한 갈망을 이끌어내어.

그렇게 작고 약한 갈망들이 모여 커다란 행동으로 나타날 때.

잘못된 방향으로 하염없이 흘러가던 세상은 힘겹게. 무겁게 올바른 쪽으로 방향을 틀어왔다고.

인간은 자신이 놓인 환경에 수동적으로 순응만 하는 게 아니야.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상태로 나가려는 보통사람들의 일상적인 고군분투가 인간의 역사를 이끌어왔다고 나는 생각해, 말씀하셨다.


"나"는 한 개인인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는 "환경"의 일부분이 된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소극적인 자세에 더해

나와 너, 우리의 환경을 더 좋게 만들려는 적극적인 마음과

이를 위한 현실적인 행동이 시대의 흐름을 만들어가겠지.

사회는 매일 가꾸고 지켜내야 하는 우리의 환경.

청소에 소홀하면 집은 금세 엉망이 되고,

밥을 먹지 않으면 곧 배고파진다.

씻지 않으면 더러워지지.

나를 위해서라도 내가 몸 담은 이 사회, 우리의 환경을 좋게 만들어야 해.


우리가 행한 이번 움직임이 세계 곳곳의 파시즘, 잘못된 권력을 바로 잡으려는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기 바란다.

지금 내가 하는 작은 행동,

생활 속에서 선택하는 결정이 다른 사람, 남의 나라에도,

또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거라고 은이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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