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생이 키워낸 집사 #10 집사에서 엄마로 2

15년차 집사의 육아반성기 - #고양희씨 (2003~2017)

by 벨롱님


모태냥집사

태교 중에 아기를 위해 인형을 만들어 주었다. 엄마가 핸드메이드로 만드는 첫 애착 인형이라 … 나는 주저 없이 고양이 패턴을 골랐다. 이름도 태명과 똑같은 '일'이다. 일이를 만들 때 늘 내 옆에 나오짱과 페코가 있었다. 일이를 다 만들고 나서 일이에게도 엄마나 아빠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큰 고양이 패턴을 구했다. 일이에겐 아빠를 만들어주었다. 일이 아빠 고양이. 왜 엄마가 아니라 아빠였을까? 페코에게 아빠가 없는 게 맘에 걸렸나, 아니면 엄마와는 잘 못 지냈지만 아빠와는 잘 지내라는 마음이었나. 아무튼 일이는 엄마 없이 아빠만 있다.


첫 애착 인형 외에도 집안에는 엄마가 그동안 모으고 애정 하는 고양이들이 너무 많다. 고양이만 보면 자동으로 하트 발사하는 엄마를 보며 자란 아이는 자연스레 고양이를 사랑하게 된다. '엄마는 고양이를 좋아하고, 나도 고양이를 좋아하면, 엄마가 나를 좋아한다' 이런 심리가 기저에 깔린 듯 하다. 아이들은 엄마가 좋아하는 걸 행동으로 하고, 칭찬받고 싶어 하는 욕망이 강하다. 아이 예뻐~ 아이 착해~라는 병은 어려서부터 엄마가 만든다.


고양이의 습성들을 익히면서 종종 아기고양이 흉내를 낸다. 4살 겨울에 H&M 매장에서 새하얗고 보드라운 털의 헬로키티 플리스를 보자마자 지갑을 연 적이 있는데 아이는 겨울 내내 그 옷만 입었다. 결국 하나 더 구입해서 매일 세탁하고 건조하기를 반복, 겨울 세 달 내내 헬로키티가 되어 주었다. 그 이유는 엄마가 좋아하는 고양이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엄마가 헬로키티 옷을 입은 아이를 보며 짓는 표정을 계속 보고 싶었던 거다.


우리는 아파트에 사는 고양이들을 챙기고, 어린이집 가는 골목의 길고양이들의 안부도 묻는다. 누가 밥을 먹었고, 누가 몇 시쯤 잘 보이고, 누가 요즘 잘 안 온다며 우린 동네 고양이들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함께 돌본 첫 길고양이는 턱시도였다. 줄여서 '시도'. 사람을 너무 잘 따르는 개냥이 성향의 시도와의 인연은 특별했다. (나오짱&페코와 달리) 너무 애교 많고 사람을 잘 따르는 시도는 아파트의 인기냥이었는데 나와 꽁이의 사랑도 많이 받았다. 시도가 일어나서 산책 나올 시간쯤 사료와 간식을 챙기고 나가서 시도와 친구들을 만나길 기다렸다. 그런데 꽤 오래 아파트에서 살았던 시도가 어느 날 사라졌다.


그 후 아파트와 어린이집 주변 길냥이들에게도 우리의 사랑은 한결같았다. 어린이집 가방과 나의 에코백엔 사료와 츄르가 가득 들어있었고, 늘 만나는 길냥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다시 기다렸다. 그렇게 턱시도, 고등어, 치즈, 때비, 삼색이, 하양이 등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루비, 요코와 함께한 우리

잠시 꼬마 집사가 되어 본 건 포틀랜드에서다. 포틀랜드에서 2주 정도 머문 예쁜 집에는 우리가 몰랐던 호스트 냥이와 댕댕이가 있었다. 체크인 후 숙소 가이드라인에서 루비와 요코를 집 안으로 들여보내지 마시오라는 문구를 봤을 때 나는 꺅 소리쳤다. 나와 꽁이는 언제 루비와 요코를 볼 수 있을까 마냥 설레어하며 기다렸는데 3일째 되던 날 우리 집 문 앞에서 햇빛을 쬐고 있던 루비를 만났다. 그리고 우리에게 수줍었던 요코와도 인사를 했고, 댕댕이 페코도 만났다. 아 페코 ... 나의 페코와 이름이 같은 강아지라 나는 심멎했다.


해가 비치는 오후면 루비가 우리 집 앞으로 오길 기다렸고, 루비와 노는 시간은 즐거웠다. 루비는 밤늦게까지 우리 집 앞에 앉아 달빛을 즐기고 있었다. 루비의 그릉그릉 소리를 듣고, 루비의 배를 쓰다듬고, 루비와 대화를 나누는 우리는 행복했다.


super friendly cat, ruby


엄마는 다시 집사가 될 수 있을까?

고양이와 헤어진 이후 나는 다시 집사가 될 수 없었다.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았다. 길고양이를 돌보는 부지런하고 사명감 높은 캣맘이거나, 유기묘나 길고양이들의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후원하는 기부자나, 유기묘를 돌보는 NGO에 소속되어 봉사활동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동네 함께 사는 길고양이들에게 가끔 사료나 간식을 챙겨주는 정도이며, 고양이를 위한 NGO 단체에 가입하지 않았으며, 가끔씩 유기묘나 길고양이를 위한 프로젝트에 소소하게 기부하는 정도이다. 고양이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헤어져서 슬프다고 하지만 정작 이 세상 고양이들을 위해 대단한 뭔가를 하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어쩌면 다시 집사가 된다고 해도 후회할 일이 반복될 수도 있다.


26살의 인생엔 모호함이 많았다. 일도, 연애도, 결혼도 모두 불확실했다. 내가 어떻게 될지 확신이 없는데 내 고양이들을 지킬 자신이 있었을까? 그 불안함 안에 살고 있었던 고양이들이 참 힘들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3년 차 직장인은 20년 차에 가까운 직장인 되었고, 늘 부족한 월급통장 대신 지금은 어느 정도 채워져 있는 적금통장이 있고, 다시 연애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도 없으며, 무엇보다 아이 엄마인 42살이 되었다. 새로울 거라고 기다리고 있는 46살의 인생에 새로운 묘연을 꿈꿔 본다. 그렇게 우리는 사랑의 온도를 서서히 높여보기로 했다.




keyword
이전 09화고선생이 키워낸 집사 #9 집사에서 엄마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