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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집사 Mar 21. 2024

고구마 취나물 잡곡밥

장바구니 원정대



  매일 집에서 밥 해 먹는 얘기를 하다 보니 물가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지난번 엄마와 언니를 만나 학폭 당한 아이처럼 장보기가 겁난다고 하소연을 했다. 무시무시한 깡패 물가에 IMF때 보다 더 위축되는 기분이 든다고. 라디오에선 사과 한 개 16000원에 파는 곳이 있다고 했고, 모 유튜버는 2600원인 줄 알고 샀던 쪽파가 26000원 인 걸 알고 황당해했다. 사과 몸값 폭등 이야기를 전하시던 기자님은 더 이상 아침 사과를 먹지 않으신다고 하셨다. 나도 왠지 그래야 할거 같아 고민이 되었지만 그래도 아직까진 꿎꿎이 아침마다 챙겨 먹고 있다.



 말이 좋아 건강식 자연식이지, 좋은 재료로 매 끼니 요리해 먹는 일은 시골 농사꾼으로 되던가, 모 엔터테인먼트 P대표 정도 되어야 가능하지 싶다. 아무래도 가공 음식보다 가격도 비싸고 만드는 시간과 수고를 감안해 보면 따로 요리사를 고용하거나 스스로 그 돈과 시간을 투자해야 되는데, 현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렇게 비효율적인 일을 하는 사람은 한량으로 보이려나 하는 생각도 든다. 언니도 조카들 채소, 과일만 먹이고 싶지만 그러기엔 너무 바쁘고 식비가 많이 든다고 했다. 맞벌이하는 세 식구 친구네도 물가는 비싸고 시간도 없어 주로 외식을 한다고한다. 이 와중에 돈 한 푼 안 버는 나는 꿎꿎이 장을 봐와 뻔뻔하게 삼시 세끼 다 만들어 먹는다. 귀찮고 힘든 면도 있고, 한 끼 정도는 대충 컵라면에 밥 말아먹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10년 뒤 내 몸에 투자한다는 마음으로 소신껏 고집을 부리고 있다.



 어제는 마트를 빙빙 돌며 4분 만에 뚝딱 완성되는 마법의 파스타와 인공 비타민이 함유된 레몬맛 젤리를 쪼물딱거리다 돌아왔다.( 아프기 전 좋아했던 것들이다.) 그나마 오전에 가면 할인 채소들이 더러 있었는데 이제 그 코너도 경쟁이 치열해 나처럼 AA형 I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다. 하는 수 없이 인터넷으로 직거래 장터를 검색해 양파와 고구마, 감자를  주문했다. 당연히 무료배송에 해당하는 일정 금액에 맞추어 샀고 다음날 바로 받을 수 있었다. 상태는 좋은 아이로 왔지만 그래도 오는 동안 이리저리 치였는지 고단한 낯빛이 역력했다. 다음엔 그냥 장날을 노려야지...



 오후쯤 되자 엄마께  전화가 와 무슨 비밀조직 밀지처럼 동네 마트의 세일 정보를 공유해 주셨다. 계란, 브로콜리, 토마토, 양배추, 버섯… 필요한 걸 사놓을 테니 시간 날 때 들러 가져가라 하셨다. 두레, 품앗이, 계… 학교에서 배운 공동체 단어들이 생각났다. 조만간 본가 동네 마트에도 진출해 봐야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요즘은 나라 안팎으로 불황이다 보니 어떻게든 아나바다의 마음으로 건강한 식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더 노력하고 있다. 겸사겸사 낭비도 줄고 쓰레기도 주는 건 다행이지 싶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번 요리는 “고구마 취나물 잡곡밥”이다. 배고픈 시절을 떠올리면 구한말 스타일로 만들어봤다. 나는 겪어보지 못했지만 과거 전쟁 직후 먹을 게 없던 시절엔 보리밥에 고구마 감자를 섞어 먹었다고 한다. 그 눈물 맺힌 음식이 지금은 건강식이고 별미가 되었다. 그렇다고 마냥 다행이다 생각하기엔 이 시대의 아픔도 작지 않다 생각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가장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 가장 취약하지만 동시에 가장 강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요리의 90프로는 밥솥이 완성해 주므로 4분 파스타 못지않게 간편했다. (물론 재료를 다듬는 시간을 제외하면.) 백미, 현미, 병아리콩, 렌틸콩을 취향껏 섞어 물에 불려 놓는다. 현미는 당을 낮추기 좋고 콩으론 식물성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다. 건취나물도 한 줌 씻어 물에 불리고, 고구마도 깨끗이 씻어 다박다박 썰어 놓는다. 불려놓은 쌀 위에 고구마와 취나물을 펼쳐 올리고 평소보다 물양을 적게 해 밥솥에 넣고 취사를 누른다. 밥이 다 될 동안 꾸리와 룽지를 불러 나 잡아봐라를 하고, 한바탕 댄스타임도 갖는다. 쿠쿠씨가 밥 다되었다고 부르면 뚜껑을 열고 주걱으로 잘 섞어 대접에 푼다.



 내 경우엔 다섯 끼 정도 소분해 냉동실에 모셔 두었다가 끼니때마다 꺼내 먹었다. 계란 프라이와 참기름을 곁들여 먹기도 하고, 김이나 깻잎지에 싸 먹기도 하고, 찌개 건더기를 퍼서 함께 비벼 먹기도 했다. 물 조절이 조금 어려웠지만 간을 맞출 필요가 없는 쉬운 요리다 보니 부담 없이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 앞으로 종종 감자도 넣어먹고 재철 나물과 뿌리채소도 넣어서 해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s 굿모닝입니다.^^ 오늘은 병원에 가는 날이라 평소보다 일찍 글을 올렸습니다. 항암치료 후 첫 번째 정기검진이라 많이 떨리지만 조심해서 무사히 잘 다녀오겠습니다. 다행히 날씨가 좋아 놀러 간다고 착각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12시간 금식이라 물도 못 먹고 있는 관계로 안 그래도 드러운 성질, 뽀록나지 않을까 조마조마합니다만.. 아무쪼록 잘 인내하여 끝나고 더 맛있고 감사한 식사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오늘 하루치 당연함을 만끽하시고 무사히 잘 넘기시길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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