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좋은 사람'과 '좋은 인연'은 다르다
어느 추운 겨울날의 스시집.
가게 안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랑하는 연인들, 가족, 친구들이 오순도순 앉아 있는 가운데 어떤 남자 한 명이 혼자 앉아 있었다.
'저 사람인가?'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물었다.
"저, 혹시..."
그는 벌떡 일어나 인사를 했다.
"넵, 안녕하세요. 김성훈입니다."
그는 인상이 좋은 사람이었다. 적당히 큰 키에, 사진보다 앳된 얼굴. 니트와 코트가 잘 어울리는 깔끔한 옷차림. 긴장한 듯했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부단히 애쓰는 모습. 나에게 호감 있는 눈빛과 말투. 대화도 잘 통했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즐겁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 밥을 먹고,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부터 잘 통하던 대화 속에서 묘한 이질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결혼한 친구들을 보면..."
"혹시 자녀는 몇 명 정도 생각하세요?"
"다음 주 토요일 시간 괜찮으세요? 아, 오전에 병원 가시는구나. 같이 갔다가 점심 먹을까요?"
첫 만남에 자녀 계획까지 묻는 그가, 두 번째 만남에 병원에 같이 가자고 하는 그가 은근히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에, 그때까진 그저 묘한 이질감 정도로 넘겼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그의 다가옴이 '슬로우 스타터'인 나와 속도가 너무 달랐다.
그는 첫 만남 이후로, 일요일마다 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갔다며 사진을 찍어 보내왔다. 고마운 마음도 들었지만, 나에겐 조금 부담으로 다가왔다. 종교가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긴 했지만, 진전되지 않은 관계에서 '맞춰주는' 행동은 원치 않았다.
두 번째 만남 전까지, 그는 이미 다음 약속들을 스케줄처럼 잡아가고 있었다. 나는 아직 그를 알아가는 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훨씬 더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마음으로 두 번째 만남의 날이 다가왔다.
그날도 그는 여러 계획을 이야기했다. 두 달 뒤의 본인의 여행 계획을 말하며,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면세에서 사다 주겠다고 했고, 연차 사용 여부를 물으며 여행을 함께 가자는 뉘앙스를 풍겼다. 결혼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꺼내며, 결혼과 자녀 계획을 언급했고, 분양받은 집을 어필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너무 부담스러웠다.
나는 쫄보 겁쟁이, 슬로우 스타터다. 아직 나는 아장아장 걷고 있는데, 그는 이미 러닝을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직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였고, 그를 천천히 알아가고 싶었는데, 그는 너무 빠르게 훅 들어와 버렸다. 그렇다고 그가 잘못한 것은 아니다. 단지, 서로의 속도가 달랐을 뿐이다. 문제는 나였다. 부담을 느끼기 시작하면 그 마음을 견디지 못해 도망갈 준비를 한다. 결국 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그에게 조심스레 마음을 표현했다.
"저는 결혼을 위해 사람을 만나고 싶진 않아요. 누군가를 만나다가 '이 사람과 계속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하고 싶은 게 결혼이에요. 그런데 성훈씨는 저와 생각이 조금 다른 것 같아요."
그는 아니라고 했다. 자기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고. 하지만 말과 행동은 이미 식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두 번째 만남 이후,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은 점점 무거워지고, 버거워졌다.
그는 내가 그리던 배우자 이상형에 꽤 가까운 사람이었다. 소개해준 친구도 그가 결혼 상대로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에게 소개해주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왜일까. 그 이유를 곱씹다 보니, 두 가지가 떠올랐다.
'부담'과 '토크배틀'.
그와의 대화는 겉보기엔 티키타카가 잘 되는 듯했지만, 돌이켜보면 서로 자기 할 말만 하는 느낌이었다. 공감 없이 자신의 얘기만 하고 있었다. 그는 내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자기 이야기를 꺼내기 바빴다. 그 때문인지, 대화 속에서 공감보다는 '토크 배틀'을 한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 5살 아이들이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내가 무서운 얘기 해줄까? 어제 꿈에서 큰 케이크가 나왔는데, 갑자기 개미가 와서 다 먹어버려떠!"
그러자 옆에서 듣던 아이가 말했다.
"이제 내가 얘기할게! 나는 어제 꿈에서 수영을 해떠!"
5살 아이들의 대화와 다를 바 없었던 그와 나. 그와의 만남을 정리하면 분명 후회할 거란 걸 알았다. 실제로 후회도 했고. 하지만, 공감 없는 대화와 감정의 부담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결국 난 그와의 만남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 이후, 주선자였던 친구와의 관계도 멀어졌다.
"야, 네가 어디 가서 그런 남자 또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그 말은 가슴에 비수처럼 꽂혀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았다. 좋은 조건, 괜찮은 사람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내 감정과 불편함을 무시했던 친구. 그렇게 친구와의 관계를 정리하게 됐다. 소개팅 하나에 사람을 잃는 상황이 참 서글펐다.
그 만남 이후, 나는 한동안 소개팅을 하지 않았다.
좋은 사람이었음에도, 불편했던 감정과 뒤섞인 기억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예민하게 생각했던 건 아닐까?'
'좋은 사람을 밀어냈기 때문에 연애를 못하는 것 같아.'
'결국 이 모든 건 내 마음의 문제이지 않을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조금씩 알게 되었다.
사람이 좋고 나쁨을 떠나, 서로 간의 속도와 온도가 맞지 않으면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는 걸.
그는 달리고 있었고, 나는 걸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맞지 않았던 건 아니다. 다만 그는 그만의 속도로 빠르게 나갔고, 나는 그를 따라갈 수 없던 것뿐이다. 그렇게 각자의 속도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갔다.
가끔 생각한다. 그는 분명 '좋은 사람'이었는데 나는 왜 밀어냈을까?
하지만 그때의 경험을 통해 난 알게 되었다.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서로 좋은 인연이 되는 건 아니란 것을. 그렇게, 조금씩 나와 맞는 사람을 알아가고 있는 중이란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