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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사람 앞에서 웃고 있던 나

13화.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던 그날의 나

by 딩끄적

소개팅이라는 자리는 언제나 묘한 마음이 든다. 어떤 사람일지 기대가 되면서도, 나랑 안 맞거나 이상한 사람이면 어쩌나 걱정이 된다. 반대로 '내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면 어떡하지?' 싶은 마음도 들고, 괜찮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이상한 욕심도 생긴다.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나도 모르게 자꾸 괜찮아 보이려고 애를 쓰게 된다.


그날의 소개팅도 그랬다. 소개팅 전날 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옷장 앞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이 옷 저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며, 외투는 어떤 걸 걸칠까 계속 망설였다. 오랜 고민 끝에 니트에 슬랙스, 그리고 코트를 골랐다. 기대가 없던 소개팅이었지만, 최소한의 예의는 차리고 싶었다. 못나 보이고 싶지 않았다.


가을비가 청승맞게 내리던 11월의 어느 추운 토요일. 하필 소개팅을 하던 날, 오전부터 업무 관련 교육이 있었다. 교육이 끝나자마자 동료들과 간단히 식사를 하고, 나는 소개팅 장소로 출발했다. 장소는 서울. 경기도에 사는 그와 인천에 사는 나, 그 사이쯤 되는 전철역을 약속 장소로 정했다. 교육장에 운전해서 갔던 나는 집에 차를 놓고 올 시간이 되지 않아, 결국 서울까지 차를 가지고 출발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토요일 저녁 시간 직전. 고속도로는 당연히 막혔다. 예상보다 점점 더 지체되기 시작했고, 처음 만나는 자리인데 지각할 것 같았다.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내가 별로인 사람으로 보이고 싶진 않은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차가 막혀서 조금 늦을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문자를 보냈고, 그는 괜찮다고 했다. 10분 정도 늦었다. 건물 처마 밑에 마스크를 턱에 걸치고 삐딱하게 서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 저 사람은 아니겠지?'


맞았다. 그 사람이었다. 고개를 까딱 인사한 그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스시가 좋으시다고 해서 찾아봤는데, 근처엔 마땅한 데가 없네요. 저는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 싫거든요. 누가 봐도 '소개팅 중'인 것처럼 보이는 것도 싫고요. 이자카야 괜찮으세요?"


나는 처음 만나는 사람과의 자리가 불편한 이유가 있다. 건강상의 이유로 음식 제한이 많기 때문이다.

"죄송해요. 제가 사실 밀가루를 못 먹어서요. 한식 종류는 괜찮으세요? 한 번 찾아볼까요?"


비 오는 길거리에서 그와 난 어디로 갈지를 정하고 있었다.

"아, 그래요? 그럼 일단 제가 찾아놓은 스시집으로 가죠 뭐. 두 군데 찾아 놨는데 한 군데는 별로고, 다른 데는 좀 걸어가야 하긴 한데, 가서 어떤지 보고요. 테이블이 너무 붙어있으면 전 못 들어갈 것 같아요."


난처한 이 상황 속의 그를 보고 소개팅 상대에 대한 예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전에 약속 장소를 정할 때 같이 찾아보겠다고 했지만, 본인이 알아서 찾아보겠다고 했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하는 말이 저 말이라니. 물론 할 말은 없었다. 첫 만남에 지각한 내가 무슨 할 말이 있으랴.


사실 그는 첫인상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턱에 마스크를 걸치고 있는 모습부터 별로였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나는 턱스크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키가 176cm라고 들었는데, 168cm인 나랑 이상하게 눈높이가 딱 맞았다. 키야 뭐, 별 문제는 아니었지만 조금 의아했다. 참을 수 없던 건 그의 껄렁한 태도였다. 거래처 직원을 대하는 듯한, 심지어 무시하는 듯한 그의 태도에 매우 당황스러웠다. '내가 별로 마음에 안 드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스시집까지 걸어가는 10분 동안, '가게를 보고 앉을지 말지 결정하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이럴 거면 그냥 아무 집이나 갔으면 싶었다. 그런데 굳이 스시집에 가겠다고 한다. 마음이 정말 불편했다.

스시집에 도착해서는 창문에 바짝 붙어 안을 들여다보더니, "여긴 테이블 간격이 괜찮네요."라며 들어가자고 했다. 그 순간 그와 함께 있는 게 부끄러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가게 안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그제야 마스크를 벗었다. 그는 마스크를 벗은 나를 보더니, 갑자기 눈빛과 표정이 변했다. 말투도 아까보단 조금 친절하게 바뀌었다.


- 저는 사실 차가운 음식을 잘 안 먹거든요. 그래서 스시는 별론데 오늘 엄청 열심히 먹고 있어요.

- 문자로 말씀해 주셨으면 다른 곳으로 갔을 텐데요... 죄송해요.

- 처음 보는데 어떻게 싫다고 해요. 말 못 하지. 찬 음식은 먹으면 먹은 것 같지 않아서 안 좋아해요. 그런데 지금 나 노력하는 거예요.


문자로 싫다고 하는 게 좋을 뻔했다. 먹는 내내 싫어한다는 말을 듣는 게 더 불편했다. 불편함을 감추고 애써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맛있게 드셔주시니 감사하네요. 따뜻한 우동이랑 같이 드세요."


스시값을 내가 계산하려고 했는데, 그가 계산했다.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 대신 카페는 내가 계산하겠다고 했다. 그가 집에 가기 가까운 전철역 입구에 있는 카페로 갔다. 나는 그에게 "드시고 싶은 거 다 고르세요"라고 말했다. 그는 디저트까지 야무지게 골랐다. 덕분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런데 그의 진짜 모습은 그때부터 드러났다.


- 제가 지금 이직을 하면 더 연봉을 올려서 갈 수 있는데, 고민 중이에요. 옮기면 일이 더 많아지고, 지금은 할 만하거든요. 커리어를 생각하면 지금이 딱 적기인데... 아, 제가 직업이 개발자라 연봉은 나쁘지 않아요.

- 아... 그러시구나... 고민이 정말 많으시겠어요. 가장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계시네요.


한참을 그의 이직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줬다.

'그치. 이직은 고민이 될 수 있지.'



- 이제 좀 있으면 이사를 가야 하는데, 걱정이에요. 저는 집을 알아볼 때, 주선해 준 형이 다 알아봐 주거든요. 나는 집 볼 줄 잘 몰라요. 또 그 형한테 부탁해야지.

- 아... 집까지 알아봐 주실 정도면 그 형님과 정말 친하신가 봐요. 정말 좋은 형님이시네요.


이 말을 듣고 멈칫했다. 차도 중고차만 사는데, 중고차도 중고차를 잘 아는 다른 형님이 봐주신다고 했다.

'내가 살 집이나 차도 혼자 결정하지 못하는 분이구나. 나보다 두 살 더 많으신데...'


30대 중반의 나이에 혼자 결정하지 못하고 가족도 아닌 남한테 의지하는 그를 보고 조금 생각이 많아졌다.

그때 그는 결정적인 말을 했다.


- 제가 처음 직장에 다닐 때, 노조 사람들을 만날 일이 있었거든요? 아니 그들을 설득해 오라는데, 갔는데 당연히 말이 잘 안 통하잖아요. 그런데 기분이 나쁜 거예요. 그 사람들은 고졸이에요 고졸. 나는 대학원까지 나왔고. 그런데 내가 저들한테 굽혀야 돼? 나는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생각해요.


순간 멍해졌다. 직업에 귀천이라... 그런 말을 누군가에게 들은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나와 처음 만나서 헤어지기 직전까지의 하는 그의 예의 없는 태도를 생각하니 이해가 되었다. 그런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정말 안 되겠다.'


하지만 대놓고 앞에서 말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어색하게 웃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아... 그렇게 생각하시는구나."와 "그럴 수도 있겠네요."를 연발할 뿐.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먼저 가자는 말을 잘 못하는 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도저히 못 참겠을 때 말했다.


"시간도 늦었는데, 이만 일어날까요?"


그는 차가 어딨냐며, 차까지는 못 데려다주고 저 앞에 신호등까지만 데려다준다고 했다. 난 괜찮다고 거절했지만 자기도 멀리 갈 생각이 없다며 저기까지만 간다고 했다. 그래, 마지막인데 이 정도는 뭐. 끝까지 웃으며 대화하며 걸었다. 그리고 신호등에서 인사를 나눴다.


"오늘 즐거웠어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가 말했다. 원래의 나라면 가식이라도 즐거웠다고 답했을 텐데, 그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웃으며 말했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날 난 그의 문자에 답하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소개팅날 분위기도 좋았는데, 연락을 받지 않았다고.



그와의 소개팅 후 나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무례한 사람에게까지 웃으며 맞춰주고 있을까? 괜찮은 사람으로 보일 필요가 있었나? 같이 무례해도 되지 않았을까? 이건 가식 아니야?'


그날 나는 끝까지 착한 사람인 척했다. 예의 바른 척, 괜찮은 척, 속으로는 수십 번 집에 가고 싶다고 짜증을 내며 겉으로는 웃고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참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주선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자 한 건지, 상대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자 한 건지. 예의 바른 사람이 되고자, 나는 스스로 지치게 만들었다.


앞으로는 조금 덜 착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불편한 건 불편하다고, 아닌 건 아니라고 솔직하게 표현하면서. 조금 덜 괜찮은 사람이어도, 조금 더 솔직하게, 나를 포장하지 않고 드러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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