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1. 기억 속에서 계속 살아가는 그 무언가
가끔,
정말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언가가 나를 멈춰 세운다.
책장을 정리하다가,
오래 안 쓰던 서랍을 열다가,
창고 안 깊숙이 묻혀 있던 박스를 우연히 꺼내다가—
나는 아주 조용히
내 안에 잊고 있던 시간과 마주하게 된다.
그날도 그랬다.
낡은 노트 몇 권,
꺼내려다 반쯤 부서진 펜,
그리고 그 아래…
접혀 있던 누런 종이 한 장.
익숙한 글씨체였다.
묘하게 삐뚤하지만
어딘지 정성스러웠던 그 필체.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어… 여기 있었네.”
그 순간,
공기 중의 습도까지도
기억 속의 그때로 옮겨갔다.
창밖엔 분명히 봄이었고,
나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고백하듯
조심스럽게 문장을 써내려가고 있었다.
그 종이는 다만 기록이 아니었다.
그건 그 시절의 나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던
시간의 향기였다.
무언가 찬란했던 순간이었고,
또 너무 평범해서 더 아름다웠던 날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을, 아무 말 없이
그 기억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잊은 줄 알았던 이 기억이
왜 지금 나를 찾아왔을까.
어쩌면
내가 너무 바쁘게 살아오느라
스스로를 놓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그 기억은
“넌 참 괜찮았어”
“그땐 참 잘 살고 있었잖아”
하고 조용히 속삭여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기억 속에 계속 살아가는 무언가란
이렇듯,
무너지지 않게 나를 붙잡아주던
단 하나의 장면일지도 모른다.
사라진 게 아니라
내 마음속 어딘가에 곱게 접혀 있었던 기억.
오늘,
그 기억 덕분에
나는 다시 나를 안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