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위에서 나를 마주하다
#12 글은 내가 아닌

#12 글은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게 해 준다

by 박동욱

글을 쓰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나"만이 아니다.

소설을 쓸 땐
상처 많은 소년이 되었다가,
사랑을 잃은 여인이 되기도 했다.
때론 내 인생에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떤 사람의 마음 안으로
몰래 들어가 본 적도 있었다.

글은 그런 걸 허락해 준다.
타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경험.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몰랐던 내 감정과 마주치는 순간들.


어느 날은,
누군가의 고독을 그리며
내 안의 외로움이 울었다.
다른 사람의 절망을 썼는데,
내 안의 오래된 상처가 반응했다.
그러니까 결국,
나는 그 사람이 되어본 게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 나를 다시 만난 것이다.


글은 연기와도 다르고,
환상과도 다르다.
그건 잠깐 동안이라도 다른 심장을 빌려
세상을 다시 살아보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쓸 때면
조금 더 부드러워지고,
조금 더 조심스러워진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사람은 왜 꼭 자기로만 살아야 할까?"
글은 나에게 대답해 준다.
"괜찮아, 오늘은 네가 아니어도 돼."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살아보지 못한 삶을 상상하고,
살아낸 삶을 새롭게 이해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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