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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Sep 15. 2023

언어의 종합 예술, 대중 연설.

소통에 필요한 것은 완벽한 한 가지가 아니다.

소통법 중 보편적으로 가장 정복하기 어려운 것이 대중 연설 (public speaking)이다. 평소에 말 잘하는 사람들도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이목을 끄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브랜드 마케팅 아트 디렉터로 승진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갑자기 과제가 하나 주어졌다. 


"며칠 후에 그룹 사장과 전 임원들에게 최근 진행한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정기 미팅이 있어. 너 최근에 한 브랜딩 프로젝트, 거기서 발표해 봐. 부담 갖지 말고 짧게 하면 돼." 


회사에서의 발표 역시 대중 연설의 한 형태이고, 리더십이 가져야 할 중요한 기술로 여겨진다. 알겠다고 자신 있게 대답은 했지만, 그룹 모든 임원들 포함 대략 1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이는 미팅이었다. 짧은 발표였고 위험부담은 없었지만, 회의실을 가득 채운 100명의 직장 상사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인데 미숙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부끄러운 부분 없이 완벽하게 해내고 싶었다. 




영어로 발표를 할 때는 한국어를 사용할 때보다 유연성과 순발력이 많이 떨어지게 된다. 돌발 상황이 발생하거나 긴장해서 말할 내용을 잊으면 적당히 다른 말로 채우기도 하고 해야 하는데, 접해본 적 없는 규모의 긴장되는 미팅에서는 조금도 자신이 없었다. 발표자료라도 만들어서 보여주며 이야기하면 훨씬 쉬울 테지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해야 하는 말을 일단 열심히 적었다. 청중이 흥미를 가지고 몰입할 수 있는 형식으로, 최대한 발음하기 편한 문장으로 구성된 나만의 작은 대본을 만들었다. 대본 없이는 아무 대책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이후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자다가 새벽에 깨도 자동으로 입에서 술술 나올 때까지 죽도록 외우는 것. 


영어로 된 글을 외워본 적이 없었다. 확실한 문법으로 또박또박 이야기하는 것이 평소에 습관이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생각보다 많이 어려웠다. 모국어라면 적당히 준비한 후 참고할 수 있는 대본을 지참한 상태에서 발표하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익숙지 않은 상황에서 영문자를 흘끗 봤을 때 전혀 바로 읽힐 것 같지 않았다. 영어를 문자로 보려면 상당히 집중해야 한다. 간판에 적인 영어나 도로표지판 등을 그림이 아닌 문자로 즉각적으로 인지하게 된 것도 불과 몇 년 전이다.   


정 어렵고 불안하면 대본을 보고 읽어도 되었겠지만 그런 어설픔은 또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별 수 없었다. 외우고 또 외웠다. 소리 내어 읽고 또 읽었다. 




이 정도면 외울 만큼 외웠다는 생각이 들 때쯤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가 생겼다. 참석해 본 적이 없는 임원 미팅이었다. 높은 직급의 모르는 사람들 100명 앞에서 직접 진행한 프로젝트를 발표한다는 것이 무슨 감각일지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다. 혼자 있을 때 외운 것을 소리 내어 말해보는 것과는 분명히 다를 것인데. 


내가 어디에서 어떤 느낌으로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야, 대본이 상황에 적합하게 쓰였는지 확인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절한 발표 태도와 매너를 가늠해 볼래도 실제로 어떨지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서는 어려웠다.  


미팅이 예정되어 있는 회의실이 비어있을 때를 틈타 들어가 보았다. 발표를 하게 될 단상에 서서, 나를 향해 놓여 있는 빈 의자들을 쭉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더 넓었고, 더 진지했고, 마음이 더 까마득해졌다. 도움이 될 만한 과거의 경험이 필요했다. 대학원 시절, 대학 시절을 몽땅 더듬어봐도 없었다. 발표보다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들이 많은 시기였다. 


시계를 더 뒤로 돌리자, 어린 시절 나름 열심히 다니던 동네 성당이 나타났다. 초등학생인 나는 백 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도 개의치 않고 미사해설을 하고, 모두에게 성경구절을 읽어 주고, 성탄절엔 무대에 올라 연극을 하며 즐거워하던 아이였다. 시계를 더 돌려 보았다. 교내 구연동화 대회에서 개구리 배가 터져버린 이야기를 하여 강당을 가득 채운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놀랍게도 1등을 했었다.    


영어를 잘 못한다는 이유로, 거리낄 것 없이 군중 앞에서 자신을 표현하던 아이가 참으로 많이 변해있었다. 몇 마디 하지도 않는 발표인데 까짓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고 있나 싶어 실소가 나왔다. 


빈 회의실 단상에 섰다. 마이크 대신에 펜을 잡았다. 모든 환경적 요소에 익숙해질 때까지 외운 대본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어릴 적 다니던 성당이라고, 구연동화 대회라고 생각하며 발표를 마쳤다. 아니나 다를까 중간에 잠시 할 말을 잊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잘 넘겼다. 부서 임원들이 하나 둘 개별적으로 찾아와서 잘했다며 독려해 주었다. 프로젝트 자체라면 모를까, 굳이 새내기 디렉터의  발표 실력을 독려할 만한 자리가 아니었는데 어딘가 격양된 느낌이었던 점으로 볼 때, 형식상이라기보다는 반전이라 생각하여 진심으로 놀란 것 같았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내가 발표를 제대로 하리라는 기대가 없었을 것이다. 


후에 모든 직급이 참여하는 마케팅 부서 정기 미팅에서 또 비슷한 발표를 할 일이 있었다. 참석 인원은 훨씬 더 많았지만, 임원 미팅처럼 경직된 분위기가 아니어서 부담은 덜 했다. 그러나 너무 편한 마음으로 임한 탓에 할 말을 잊고 어설프게 버벅거렸으며, 영어 문장도 문법이 많이 망가졌다. 당황하거나 동요하지는 않았지만, 더 잘할 수 있었는데 방심하여 연습을 게을리했다는 생각에 발표 후 의기소침해졌다. 피곤이 몰려왔다. 혼자 있고 싶었다. 미팅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정말 의외였다. 미팅을 마치고 회의실을 나서며 마주친 홍보전략팀 사람들에게 오늘 발표 중 나의 발표가 가장 재미있고 이해하기 쉬워 기억에 남는다는 진심 어린 피드백을 받았다. 그 팀은 발표를 매일 밥먹듯이 하는 사람들이 모인 팀이기 때문에 잣대가 높다. 평소에 우리 팀과 사이가 좋지도 않았다. 그런 만큼 더욱더 고맙고 기뻤다. 


영어를 완벽하게 하지 못해도, 발표답게 진지하지 못하고 좌충우돌이어도 좋은 발표라고 여겨질 수 있다는 부분에서 의미가 남달랐다. 영어가 능숙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발표를 꺼리게 되었었는데, 정작 발표의 질을 좋게 만들고 사람들의 이목을 끈 것은 유창한 영어 실력이 아니었다. 진정성 있게 공감을 유도하는 스토리텔링을 위한 부단한 노력과 특별할 것 없는 한국에서의 어릴 적 경험이었고, 나만의 캐릭터였고, 이제까지 피땀 흘려 갈고닦은 지식과 통찰을 우려낸 작업물이었다. 


내가 가진 발표를 위한 능력과 기술들은 그 어떤 것도 완벽하지 않았다. 하지만 각각을 따로 평가하며 완전하지 않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전부 끌어 모아다가 적재적소에 놓고 소통의 도구로 사용하면 되는 거였다.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동시에 조금씩 성장할 수 있었다. 완벽한 한 가지의 능력을 가진 것보다 유연하게 도약하여 멀리 날아갈 수 있었다. 

이전 20화 공감과 통찰, 소통의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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