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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Sep 18. 2023

꿈을 꾸려니 언어가 여전히 발목을 잡았다.

꿈이라 불러 보지도 못한 채 시간만 흘렀다.

나는 미국인들보다 소통을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약점으로 여겨 위축될 필요가 없었다. 모국에서 모국어로 최고를 노리는 사람들과는 다른 방법이 필요하고, 길을 조금 돌아서 가야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내가 닿는 곳 역시 그들이 도달하는 곳보다 척박한 곳이라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30대 중반이 넘어가면서부터였을까, 선한 영향력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내가 가진 지식이나 경험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힘이 되었으면 했다. 반농담으로 음유시인이 되어 세상을 위한 시를 쓰는 삶을 살고 싶다 하기도 했다. 


팀원들과 영향을 주고받을 때, 그리고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취지의 프로젝트를 주도할 때 가장 기뻤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회사의 비전에 공감하고 같은 방향으로 힘차게 노를 젓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내 목소리에 계속해서 더 많은 힘을 싣는 것은 실력과 신념으로만 되는 일도 아니었고, 규모가 있는 회사다 보니 모든 일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큰 배는 느리다. 내가 키를 잡은 선장이 될 때쯤에 나는 닳고 해져 더 이상 남에게 나누어줄 빛나는 해저의 보물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매일 좌절했다. 모든 것이 역사상 가장 빠르게 움직이고 변화하는 시대, 튼튼하고 재빠른 작은 보트 한 척이 큰 배보다 바다를 유연하게 항해할 수 있을 터였다. 보트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고, 크리에이터 이코노미에 관심이 생기게 되었다. 




크리에이터의 콘텐츠와 회사에서 만드는 마케팅 콘텐츠는 다루는 브랜드와 목적이 다를 뿐 비슷한 점이 많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제껏 쌓아 온 지식과 기술로 원하는 대로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크리에이터는 잠재적으로 세계의 모든 인터넷 이용자와 소통을 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허락을 받을 필요도, 기다릴 필요도 없다. 최소한의 자본으로, 바로 이야기를 시작하면 된다. 배를 띄운 후 노를 저으면, 내가 젓는 만큼 나아간다. 암초를 만나도 나의 선택, 순풍을 타고 빠르게 순항해도 나의 선택이다. 선택이 책임이 되는 만큼, 내 목소리에도 더 큰 힘이 실린다. 


크리에이터로서 영향력을 쌓고 싶다면, 양질의 콘텐츠를 되도록 자주 올리는 것이 성장의 열쇠다. 직업으로 삼을 목표라면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부분이다. 적어도 하루에 숏폼 영상 하나정도는 발행 가능해야 한다. 항상 최선의 모습을 보여야 하고, 관심을 끌기 위한 장치도 고민해야 하며, 논란과 구설수를 불러올 수 있는 말실수도 조심해야 한다. 인프라가 좋은 회사나 자본력과 인지도가 있는 크리에이터라면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시작하는 개인이 모든 걸 다 해내는 것은 난이도가 높다.  


부담으로 다가오는 작업량에 더해 또 하나 걱정인 것은 치명적으로 중요한 말과 글이었다. 한국에서 20년, 미국에서 20년을 지낸 내가 크리에이터로서 메시지를 전한다면, 두 나라의 언어를 모두 적절히 사용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언어로만 전하는 것도 쉽지 않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이야기하고 설득력을 가지려면, 어떤 식으로든 2개 언어를 모두 사용해야 할 터였다. 


한국어는 모국어이며 분명 상위권 수준의 구사력이 있었지만, 앞서 말했듯 어느 순간부터인가 퇴화하고 있었다. 문장 어순도 헷갈리고, 한국어로 대화를 할 때도 영어를 섞어 사용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영어가 나의 감정이나 특정 상황을 표현하기에 더 적합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습득한 지식들은 한국어로 잘 모르기 때문에, 전공지식이나 미국에서의 생활적인 부분으로 넘어가면 더욱 그렇다. 


영어 역시 비슷한 이유로, 곧잘 하는 것 같지만 많이 부족하다. 애초에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만 무언가를 전달하려고 하는 것은 진정성의 측면에서 위험부담이 있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유익하게 여기고 공감할 이야기를 많이 가지고 있는 나는 자연히 한국인들과 가장 소통이 잦을 텐데, 굳이 영어로만 이야기하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게다가 영어로 작성한 중요한 내용은 첨삭이 항상 필요할 터였다. 그걸 매번 첨삭해 주고 조언해 줄 사람을 곁에 둘 수 있을 턱이 없다. 설령 가능하다 해도 첨삭에 시간이 소요될 텐데, 모든 게 빠르게 움직이는 크리에이터 세계에서의 경쟁력이 너무 떨어진다.      


이렇듯 나의 언어적 한계를 짚어볼 때, 불특정 다수에게 무작정 정보나 생각을 공유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은 상황이었고, 부족함을 채워가며 콘텐츠마다 소비해야 하는 시간이 도전의 큰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원하는 곳을 향해 날아갈 수 있는지를 알고 있는데 현실적으로는 기어가야 했다.  


콘텐츠를 만들고, 나를 알리고, 커뮤니티를 만들고, 책도 쓰고, 강의도 하고, 전시도 하고 등등, 그렇게 되도록 많은 이들과 소통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 꿈을 이루려면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았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꿈이라고 불러보지도 못한 채 시간만 보냈다. 

이전 21화 언어의 종합 예술, 대중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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