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로 Sep 09. 2023

소통과 도약의 도구로 발돋움한 영어.

미국과 한국을 둘로 나누어 놓을 이유가 사라진 그때.

한국에 가족과 친구들을 보러 잠시 방문했을 때였다. 배달음식 주문을 하려고 했는데, 난 한국 휴대폰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휴대폰 인증을 통해 처리하는 한국에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주문 번호를 찾아, 그때만 해도 집에 있던 무선 전화기를 이용하여 주문전화를 거는 것에 성공했다. 


한국말로 주문 전화를 걸어보는 것이 너무나도 오랜만이라 어색했지만, 전화받으시는 분이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뭐든 차근차근 친절하게 대응해 주셔서 어떻게 잘해 냈다. 주문을 마쳤으니 집 주소를 불러드려야겠다 생각하던 찰나였다. 전화기 건너편 낭랑한 목소리가 말했다. 


"XX 아파트 XX동 XX호 맞으시죠?" 


화들짝 놀라 두 번 생각할 틈 없이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아니 도대체 그걸 왜, 어떻게 아세요?" 




한국에서 20대 초반까지만 살았다는 것은, 이후 지속적인 소통 능력 발달을 위해 생활 속에서 쌓였어야 할 데이터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은 그냥 하루하루 사는 것만으로도 쌓이는 것이지만, 난 다른 나라에 살았기 때문이다. 시대와 사회의 변화와 함께 한국에 생기는 일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또한 나이에 걸맞지 않게 대학 새내기 시절의 언행이 버릇처럼 그대로 남아있었고, 다양한 사회적 상황에서 내 나이의 한국인이 사용하는 알맞은 어휘를 잘 몰랐다. 겪어본 적이 없기에 그렇다. 


20대 초반 이후 미국에서 익힌 지식은 한국어로 단어를 잘 모르고, 조리 있게 설명하기도 어려웠다. 영어도 잘 못하는 주제에 영어로는 알아도 한국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문장 어순 같은 것도 무척 헷갈렸다. 여러모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미국에서는 반대로 태어나서부터 20대 초반까지의 데이터가 없기 때문에, 미국인들이 그 시대,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한국에서 어릴 적부터 미국 문화에 많이 노출이 되었는데도, 영 익숙하지 않은 소재들이 많았다. 이는 자연히 친구를 사귀는 것에 장애가 되었다. 어린 시절의 공통된 추억과 관심사가 많은 관계일수록 더 쉽게 친해지는 건 별 수 없는 사실이니 말이다. 


그리고 어릴 때 보통의 미국 아이들이 부모님이나 다른 어른들을 보고 배우는 기본적인 것들을 몰랐다. 미국인들의 생활 방식, 미국식 아파트나 주택을 관리하는 법, 미국에서 돈을 관리하는 법, 일상 속의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법, 식당 매너, 사람을 대하는 법... 그리고 이 모든 것들과 관련된 어법과 어휘. 모두 내 나름대로 새로 배워야 했다. 


대학 졸업 후 처음 얻은 직장에서 팀이 모두 함께 워싱턴으로 출장을 갈 일이 있었다. 팀 저녁식사로 바닷가재 요리를 먹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 지금만큼 많이 알려진 재료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에서는 잡히지 않기 때문에 비싸기도 하고 말이다. 


먹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먹는지 알 수가 없었다. 조용히 껍질과 씨름하다 바닷가재의 일부가 튕겨나가 맞은편 동료의 접시에 난잡하게 떨어졌다. 나름 귀하게 잘 먹고 자랐건만, 바닷가재가 뭔지도 모르고 먹는 법도 모르는 미숙하고 가여운 외국인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나는 하나고, 한 번에 실존할 수 있는 장소도 하나고, 살아가는 시간의 모래시계도 하나다. 그런데 하나인 나를 두 나라가 나눠 가졌다. 흔히들 막연히 한국어와 영어, 한국과 미국을 각각 구분 지어 생각하지만, 생각보다 이중 언어 소통 능력이라는 건 나라를 따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도 키울 수도 없는 능력이다. 내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해결책이 묘연하니 이처럼 철학적으로 흘러가버리곤 했다. 요즘 사람들이 기후 문제를 고민하는 것과도 비슷했다. 문제를 확실히 인지하고 있고 상황은 점점 안 좋아지지만, 매일을 사는 것에 급급하기에 "어떡하지 큰일 났네" 막연하게 걱정만 하고 대책은 세우지 않는 것. 


계속해서 방구석에 밀어놓은 채 해결을 미뤘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크기가 눈덩이 불듯 불어 방 안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도리어 방구석으로 밀려들어 갈 때쯤, 일련의 큰 사건으로 몇 가지를 깨달았다. 




무더운 여름, 아버지가 암으로 위독해지셔서 병원에 입원하셨고, 결국 세상을 떠나셨다. 그 과정을 가족들과 함께하기 위해 한국을 여러 번 들렀다. 병원에서 의료진들과 이야기하고, 의료기구를 사러 다니고, 평소에 교류가 많지 않던 친척들과 부모님의 주변 지인분들도 만날 일이 많았다.  


어른의 대화, 어른의 매너, 어른의 일처리, 어른의 병사. 20대부터 주변에 평범한 '어른'이라고 할만한 가까운 사람이 없었던 나로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어른이어야 했던 매일이 생경했다. 30대였던 스스로가 어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당시 뉴욕에서 다니던 회사에서 역시, 어른의 소통법을 익히는 것이 어려워 고생을 하는 중이었다. 


놀랍게도 그 여름 한국에서의 경험들은 생각해 본 적 없던 또 다른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 내었다. 한국에서 한국어로 보고 듣게 되는 어른의 소통법, 그 어휘와 표현, 매너를 어깨너머로 익히게 되자, 그것을 미국에서 영어로 소통할 때에 적절히 적용하는 방법이 자연스럽게 함께 습득되는 경험이었다. 


어른의 사회생활을 해내기 위해 미국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의 언행을 관찰하는 것도, 미국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배워보는 것도, 항상 어딘가 와닿지가 않고 체득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가족들이 다른 이들과 사회적 소통을 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도 직접 체험하게 되면서, 어려움을 겪던 많은 부분이 해결되었다. 어릴 때부터 익숙한 사람들이 모국어로 사회 활동 하는 것을 접하는 것이, 사회생활이라는 보편적인 범위에서의 소통방법에 대한 이해를 도운 것이다. 


구체적인 경험의 측면에서도 많은 도움이 되는 것을 확인했다. 나는 미국인 직계 가족이 없고, 그러니 그들이 병원에 입원할 일도, 세상을 떠나 장례를 치를 일도, 병문안 온 사람들과 조문객들을 대할 일도 없다. 이전까지는 이렇듯 미국에서 경험할 수 없는 것과 관련된 영어 소통을 잘 해내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국에서 겪어보니 그렇지가 않았다. 둘 중 어떤 언어와 문화이든 상관없이, 경험 자체의 유무가 소통법을 익히는 데엔 더 중요했다. 




영어를 잘하려면 영어로 책을 읽고, 영어로 TV를 보고, 영어로 소통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어느 시점까지는 사실이었다. 영어를 사용하는 매체와 시간을 늘려서 영어 실력을 늘렸다. 하지만 두 언어와 문화가 내 안에서 모호하게 경계를 잃어버리는 단계에 도달한 후에도 따라야 할 방법은 아니었다. 


전부 맞춰지지 않아 답답한 한국과 미국 두 나라의 퍼즐은 꼭 둘을 따로따로 맞추려고 끙끙대지 않아도 괜찮았다. 두 군데에 다 쓸 수 있는 공통된 하나의 퍼즐 조각을 필요에 따라 나름대로 만들어내면 그만인 것이다.


둘 중 아무것도 제대로 못하는 것 같다고 자학할 필요가 없었다. 영원히 다 맞추지 못할 퍼즐이라고 불평할 이유도 없었다. 한 조각으로 두 개의 퍼즐을 동시에 맞춰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나의 특별한 능력이자 무기가 되었다. 영어는 더 이상 생존의 수단이 아니었다. 소통과 도약을 위한 도구였다. 

이전 18화 40% 미국인, 60% 한국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