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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Sep 07. 2023

40% 미국인, 60% 한국인?

미국과 한국이 나를 가운데 묶어 놓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Fat Cat에서 토요일 8시에 모이자!" 


선선한 바람이 부는 맑은 가을밤, 동기 중 한 명의 생일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Fat Cat을 향했다. Fat Cat 은 뉴욕 웨스트 빌리지에 위치했던 술집이자 복합적인 문화공간으로, 주로 학교 친구들과 즐겨 가던 곳이다. 땅값 비싼 뉴욕임을 감안할 때 무척이나 넓은 편이었고, 어둑어둑한 지하공간임에도 활기차고 젊은 분위기가 강했다. 안에는 보통의 바나 라운지와 같은 시설뿐만 아니라 탁구대, 푸즈볼, 보드게임 등 미국인들이 보편적으로 즐기는 놀거리들이 많아서, 많은 인원이 가볍게 모여 놀기 무난한 것이 큰 장점이었다. 


도착해 들어가자 쿵쿵 울리는 음악이 커다란 공기 덩어리 부서지듯 고막을 파고들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어두운 조명 아래 탁 트인 넓은 공간이었지만, 사람으로 빼곡하여 두세 뼘 이상의 시야를 확보하기 힘들었다. 중간중간 놓여있는 의자와 소파에 모여 앉은 사람들, 이곳저곳 빈 공간에 둥그렇게 모여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 


두리번두리번, 익숙한 얼굴들이 어디에 모여 있는지 찾아보았다. 일행 중 한 명이 나를 알아보고 손을 흔든다. 다가가서 가벼운 포옹을 하고 주변과도 인사를 나눴다. 평소 표정이 많지 않고 말수도 적은 나지만, 미국의 온도에 맞춰야 했다. 평소보다 하이톤으로, 마치 10년간 찾아 헤맨 실종된 가족을 마침내 찾아낸 순간처럼, 눈을 크게 뜨고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지르며 두 팔 벌려 반가움을 표현했다. 


음악소리가 가득하여 인사는 물론이요 대화를 나누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늘 있는 일이다.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없는 곳에 모여 함께 노는 것. 마치 혼자이긴 싫지만 그렇다고 너무 가까이 얽히기도 싫은 사람들처럼. 


생일을 맞은 친구를 격하게 안아준 후, 귀에 대고 외쳤다. "안녕! 생일 축하해! 술 한 잔 가지고 다시 올게!" 




테이블에 함께 모여 앉아 상다리가 휘도록 안주를 시켜놓고 술잔을 돌리는 것이 익숙한 한국과 달리, 미국은 각자 바에서 마시고 싶은 술을 주문한 후, 적당히 돌아다니면서 이 사람 저 사람 바꿔가며 이야기를 나눈다. 앉을만한 곳이 마련되어 있을 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무작정 선 채로 수다를 떨어야 하는 모임이 많다. 안주는 보통 시키지 않고, 배가 고프면 다른 곳에서 미리 허기를 채운 후에 술집을 향하곤 했다. 


한국에서는 편안히 앉아서 술과 음식을 즐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참여하게 되고, 그렇게 일행들과 더 돈독해지곤 했다. 하지만 미국은 참 달랐다. 일단 주로 서있어야 해서 다리도 아프고 불편했다. 게다가 사람들을 알아서 찾아다니며 인사하고 대화에 적극적으로 끼어들지 않으면 소외되어 버리기 십상이었기 때문에, 초반 낯가림이 심한 편인 내게는 난이도가 높았다.  


불굴의 적응력으로, 나름 미국의 음주 파티 문화를 위한 새로운 매너와 처세술을 익혀 나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파티에서의 소통이 재미있고 편안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한국과 비교하여 장점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들도 많았다. 


예를 들어, 싫으나 좋으나 한 테이블에 모여 앉아 대화에 참여해 있어야 하는 경우가 많던 한국과 달리, 마치 지나가다 잠시 들르는 것처럼 서서 이야기를 하다가 언제든 끊고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있는 것이 좋았다. 마치 심심한 밤 온라인 채팅방 한 곳에서 떠들다가 시들해지면 다른 채팅방으로 옮겨가 보는 것처럼. 


그래도 말하다 말고 그냥 돌아서서 다른 그룹으로 가는 건 어색하기에, 내가 즐겨 사용하던 인사말이 하나 있다. "술 (빈 잔을 가리키며) 한 잔 더 (바에서) 가지고 올게.". 다녀오라며 흔쾌히 보내주는 사람들 역시 내가 아마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다른 채팅방에서 아마 또 만날 테니까.




보통의 한국 술자리에서는 "술 한 잔 더 가지고 올게."라는 말을 다른 자리로 이동하기 위한 인사말로 사용해야 할 일이 없다. 문화의 차이를 배워나가는 과정에서, 본래 알고 있던 문장이 생경한 의미를 가진 새로운 표현으로 내 머릿속에 저장된다. 


맥주병을 손에 들고 서서 이야기하는 게 다리 아프고 귀찮은 만큼, 안주가 없는 것이 허전한 만큼, 돌아다니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말 붙이는 것이 어색한 만큼 나는 한국 문화에 익숙한 한국인이었다. 그 불편함이 조금씩 사라져 가는 만큼 나는 미국 문화에 적응한 미국인이었다. 미국과 한국의 문화가 나를 가운데 묶어 놓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언어 - 영어와 한국어 - 역시 상황이 마찬가지였다. 




"그.. 그 단어가 한국말로 뭐더라?" 

"뭐라고요? 너무 빠른데..." 


일취월장한 디자인 실력, 처음 미국 땅에 떨어졌을 때에 비하면 감격스러울 만치 능숙해진 영어 소통 능력. 그 둘에 어쩐지 우쭐해질 무렵 생각지 못한 복병이 있었으니.. 영어가 나아질수록 조금씩 잃어가던 한국어 실력이었다. 


영어를 사용하는 기간이 길어지고 실력이 향상될수록 한국어의 어휘력은 감소한다. 한국어만큼은 자신 있던 나였는데, 생각이 나지 않는 단어가 많아지니 문장이 장황해졌고 한국에 가면 사람들이 말을 너무 빨리 해서 알아듣기가 어렵다고 느꼈다. 모르는 영어 단어가 많아 문장이 장황하고 미국인들이 말을 빨리 해서 알아듣기 어려운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어진 것이다. 


미국에서 영어와 한국어를 모두 구사하는 몇몇 친구들끼리 우스갯소리로 우리는 "bi-lingual"이 아니라 "bye-lingual"이라는 등의 자학적 농담을 종종 하곤 했다. 이중 언어 사용자라는 단어는 결국 아무 언어의 사용자도 아니라는 뜻으로, 영단어를 이용한 작은 장난이다. 우리가 이런 소리를 하며 진심으로 낄낄대는 것은, 전반적인 언어구사력이 모국어나 외국어나 이도저도 아니기가 마찬가지로 되어버리는 슬픔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생일 파티는 좀처럼 파하지 않고 계속되었고, 나는 술을 많이 마신건지 피곤했던 건지 꽤나 취해 있었다. 새벽 2시. 집에 가는 것이 좋겠다 생각되어, 일행들을 찾아 작별인사를 건넨 후 계단을 올라 지상으로 빠져나왔다. 길 건너에 피자집이 하나 보였다. 늘 그곳에 있었다. 갈 일이 없어 무심히 지나쳤을  뿐. 


소위 뉴요커들은 음주 후 새벽 귀갓길에 뉴욕 피자를 한 두 쪽 먹는 것을 좋아한다. 그때 먹는 피자가 가장 맛있다고 했다. 한국에서 친구들과 망원 우동의 칼칼하고 시원한 우동 국물로 해장을 하며 술자리를 마무리하던 것의 뉴욕 버전인 셈이다. 


한국에서 술자리를 배웠다. 뜨겁고 얼큰한 국물로 해장을 하는 것이 체화되어 있던 나에게 술 마신 후에 기름진 뉴욕 피자를 먹는다는 건 상상만 해도 너무 느끼하고 거북했다. 궁금함에 몇 번 시도해 보긴 했지만 속만 불편했다. 


별 일이다. 그날따라 그 집에 들러 피자를 한쪽 먹고 싶었다. 맛있을 것 같았다. 토핑 없는 치즈피자 두 쪽을 시켰다. 오븐에서 갓 꺼내어 치즈가 먹음직스럽게 녹아내리고 기름이 자잘하게 보글보글 끓고 있는 그 표면 위에, 가게 안에 구비된 말린 고춧가루(dried red chili pepper flakes), 마늘 가루(garlic powder), 오레가노(dried oregano), 파마산 치즈 가루(grated Parmesan cheese)를 듬뿍 뿌렸다. 한 번도 이렇게 성심성의껏 먹은 적이 없었는데,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한 입 베어 물었고, 세상이 거꾸로 뒤집혔다. 완벽했다. 취중 새벽 2시 귀갓길에 먹는 뉴욕 피자를 대체할 음식이 있을 수는 없다. 나도 이제 뉴요커가 된 걸까.  




새로 습득한 문화가 내 안에 존재하던 문화를 지워낸다. 그날 새벽의 뉴욕 피자 이후로 망원 우동은 그립지 않았다. 뉴욕 피자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찾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어와 문화는 함께다. 피자가 어느 날 갑자기 우동을 밀어내듯, 영어도 소리 없이 내게서 한국어를 조금씩 밀어내고 있었다. 내가 한국인이 아니어도 괜찮다면, 이대로 완전히 미국인 뉴요커가 될 수 있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다. 하지만 나는 100% 한국인으로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고,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100% 미국인은 될 수 없다. 피자가 질리는 날은 반드시 찾아올 것이고, 그때 나는 또 망원 우동이 그리울 것이다. 


40% 미국인이자 60% 한국인, 대충 이 정도로 주파수를 맞춰놓고 산다면 괜찮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영어가 나아지는 걸 보며 언어 능력이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둘 다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건 오히려 퇴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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