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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Sep 05. 2023

언어의 균형을 찾는 외줄 타기.

소통을 위한 모든 무기가 한데 모였다.

학교가 나를 궁지로 모는 것 같았지만, 정작 13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그렇지 않다. 사회에서 곤경에 처할 때면 대학원생 시절 혼나가며 배운 것이 몇 번이고 도왔다. 그러나 모든 것엔 그에 맞는 때와 상황이 있다. 미국 체류를 위한 취업이 중요하던 나로서는 학교가 원하는 것을 100% 온전히 따를 길이 없었다. 


대학원을 다니는 내내, 근시안적이고 지혜롭지 못한 학생으로 여겨지는 것을 감수하고 어떻게든 일반적인 취업 준비를 계속해나갔다. 전공 수업에 올인하는 것을 포기하고, 포트폴리오와 경력에 도움이 될 만한 선택 과목이나 인턴십 등에 공을 들였다. 웃어야 할 일인지 울어야 할 일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옳았다는 것은 졸업 이후 내 앞에 열린 세상이 또박또박 이야기해 주었다. 


우려했던 대로, 갓 졸업한 학생들을 찾는 보통의 디자인 계열 취업 시장에서는 아무도 지원자가 발표를 잘하는지, 글을 잘 쓰는지, 사회적 책임감을 가진 작업을 하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실무에 필요한 기술이 갖춰져 있는지, 그걸 증명할 포트폴리오가 있는지, 말 잘 듣고 똑똑한지가 관건이었다. 특히 나 같은 '외국인 노동자'의 신분이라면 더욱 그랬다. 의사소통은 잘 안되지만 기술이 좋다는 밑도 끝도 없는 선입견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다. 


역풍과 싸워가며 최선을 다한 구직 준비 덕에, 취업 비자와 영주권을 스폰서 해 줄 회사를 1년이라는 주어진 기간 안에 찾게 되었다. 재능 있는 상사들과 동료들이 넘쳐나던 그곳에서 나는 인생 최고의 사수이자 은인 R을 만났다. 




R은 훌륭한 리더였다. 나도 모르던 나의 가치를 인정해 주고,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뭐든지 성심성의껏 될 때까지 도와주고, 필요하다면 나를 위해 싸우고 내 뒤를 챙겼으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기뻐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R의 역량은 창의적인 측면에서 무척 뛰어났고, 무엇보다도 늘 진심이었다. 어떤 프로젝트던지 대충 끝내고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아무리 작은 프로젝트여도 상황이 허락하는 내에서 최고의 완성도를 원했고, 가능한 가장 신선한 아이디어와 결과물을 얻기 위해 그 무엇도 관성적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항상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스스로를 밀고 채찍질하며 창작에 임해야 해. 안 그러면 낡은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 되어버려."라며 계속해서 생각하고 도전할 거리를 안겨 주었다.   


대학원에서 강조했지만 면접을 본 어느 회사에서도 알고 싶어 하지 않던, 자신의 작업물을 말과 글로 풀어내는 기술 역시 R은 그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뭐든지, 심지어 여백에 점을 왜 찍었는지도 말로 풀어 설득할 기술이 있어야 한다고 늘 상기시켜 주었다. 아무도 신입 외국인 디자이너인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할 일이 없었는데도 중요하다고 말해준 것이 좋았다. 나의 생각이 다른 이들에게 의미 있어질 때까지 성장할 수 있다고 믿어주는 것 같아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서툴러 불편한 점이나 고민이 있으면 말을 잘 못하고 표정에만 투명하게 드러나던 나였다. R은 늘 참을성 있게 "나한테 얘기해 봐. 나에겐 중요한 얘기야."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어렵게 입을 열어 설명하면, 즉각적으로 해결해 주었다. 


내 컴퓨터를 새로 구입해야 해서 사내 담당자가 R에게 필요 사양을 묻자 R은,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걸 사줘. 난 상관없으니 내 컴퓨터보다 좋은 걸로 사줘. 나보다 제로가 더 좋은 걸 쓰는 게 맞아."라고 대답했다. 한결같았다. 내가 최적의 상황에서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힘이 닿는 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상사는 처음이었다. 나는 R에게 리더십이 뭔지, 리더다운 사고방식과 의사소통법이 무엇인지, 어떻게 리더로서 팀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지를 배웠다. 


R은 나보다 일찍 회사를 떠났지만, 그 후에도 상사와 동료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들은 내게 필요한 여러 가지 소통 능력을 끌어올려 주었다. R을 만나고 퇴사하기까지 시각 언어를 주 무기로 다루는 디자이너로서 가장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그 예리해진 칼날이 희소가치 있는 나만의 새로운 무기들을 개발하는 걸 도왔다. 그곳에서 배운 창작자와 리더로서 가져야 할 소통의 자세 역시 그 이후 십 년간의 성장의 토대가 되었다. 




다양한 언어를 다루는 균형을 찾아가기 시작한 그 시절의 나는 외줄 타기를 처음으로 익혀나가는 사람 같았다. 줄을 밟자마자 고꾸라지기를 반복하더니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며 이를 악물고 서 있어 보는. 바르르 떨며 불안하게 흔들대지만 어떻게든 버티고 올라서 있는. 


이제는 제법 줄 위에서 여유도 부려보곤 하는데, 그렇다고 힘들지 않은 것도 아니고 무섭지 않은 것도 아니다. 앞으로 줄 위를 뛰어다녀야 할 날도 있을 테고, 몇 바퀴씩 돌아야 할 날도 있을 텐데, 정말이지 한도 끝도 없다.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그래도 포기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달리는 것은 어째서일까? 적당한 곳에 정착하는 것도 괜찮지 않은가. 어째서 나는 대학원 시절 내내 피해 다니던 길을 지금 좌충우돌하며 달려보고 있을까. 이 끝에는 무엇이 있고 나는 하고 싶은 수많은 일들 중 무엇을 이룰 수 있게 될까. 


아직 오지 않은 나의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이제까지 온 길을 알기에 이야기한다. 어디로 왔고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이 글을 보는 당신들과 함께 달리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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