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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Sep 13. 2023

공감과 통찰, 소통의 완성.

영어가 부족해 도리어 갖게 된 특별한 기술.

많은 초보 디자이너들이 디자인을 개인의 예술작업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곤 한다. 의뢰인으로부터 풀어야 할 문제를 전해 받았을 때, 되도록 시각적으로 논리적이고 아름답게 표현한다면 해결책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디자이너가 보기에 심미적으로 완벽한 작품이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디자이너를 고용하여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은, 디자이너가 자신들이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을 도와주길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심미적인 부분을 고려하기 이전에, 돈을 끌어올 수 있도록 방향이 설정되어야 하고 전략이 세워져야 한다. 이는 결국 시장의 흐름을 읽고 소비자의 마음을 알아채야 함을 뜻한다. 


경험이 쌓임에 따라 디자이너들도 점점 전략적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전문가로서 여전히 미적인 부분을 가장 중요히 여긴다. 의뢰인은 보통 디자인을 잘 모른다. 그래서 디자이너는 크게 신경 쓰지 않지만 자신에게는 중요한 것들을 중점적으로 고려한다. 이런 전문성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의뢰인들은 디자이너들이 듣기에 경악할 법한 요청도 서슴지 않고 할 때가 많다. 그들이 디자이너에게 무례하다면 문제지만, 그게 아니라 단순히 디자인을 몰라서 디자이너와 같은 언어로 소통을 하지 못하는 거라면,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답답해만 할 것이 아니라 열심히 경청하고 서로의 의견을 조율해야 한다. 




학생 때부터 경청과 조율의 중요성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사실 피할 수 있다면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대학 수업 시간에도 그랬고, 사회에 나온 후에도 한결같았다. 영어로 소통하는 것이 불편하고 귀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제는 해야 하고, 일도 해야 하고. 


그러니 디자인을 할 때 항상 최소한의 말과 글로도 상대가 이해하게끔 결과를 내어놓아야 한다는 압박 속에 있었다. 복잡한 설명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 불편했고, 애초에 그런 국면에 접어든다면 영어가 부족한 나로서는 설득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에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보여주는 작업물이 직관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데에 자연스레 남들보다 시간을 많이 쓰게 되었다.  


영어 실력이나 의사소통 능력을 키우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짓이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능력을 대신 얻게 되었다. 못 알아듣는 언어로 소통을 하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눈치가 좋아졌고, 말의 핵심을 빠르게 파악하는 능력이 키워졌다. 더 나아가 의뢰인/상사처럼 생각하는 법을 익히게 되었고 궁극적으로 소비자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큰 그림이 무엇일지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공감과 통찰의 능력이 쌓였다. 

 

이 뜻밖의 능력은 연차가 쌓일수록 쓸모가 많았다. 최소한의 소통으로도 의도를 파악하니 일의 효율이 증가했다. 늘 상대의 입장임이 증명되니 신뢰를 구축하기도 더 쉬웠고, 결과물은 모두에게 만족스러웠다. 이렇게 남들과 차별화할 수 있는 유용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은 감이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 자신, 그리고 내 주변의 선입견이었다. "나는 영어가 서툰 편이니까."라는 생각, 그리고 "저 사람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니 업무 상 소통이 어렵겠지."라는 직장 상사와 동료들의 생각이, 사실은 내가 부족한 영어라는 페널티를 상회할 만큼 가치가 높은 소통 능력을 소유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박탈했다. 




디렉터로 승진하고 업무를 해나가면서 '과연 내가 정말 소통에 문제가 있긴 한 것일까, 사실 소통을 잘하는 게 아닐까'라는 의문이 커지던 때였다. '영어가 원어민만 못하니, 소통도 못할 것이다."라는 선입견을 박살내고, 나에게는 정말 문제가 없다는 확신을 갖게 한 작은 사건을 겪었다. 


내가 업무 상 좋은 성과를 냈을 때 늘 냉소적이던, 협업이 잦은 부서의 상사들이 몇 있었다. 그중 한 명인 P와는 늘 규모 있는 프로젝트를 함께 했다. 어느 날, 다른 부서의 피드백을 받아 우리가 제안한 디자인들을 수정해야 할 일이 있었다. P와 나는 함께 몇 번의 미팅을 들어가 수정을 요구하는 부서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정을 진행하는데, 나와 P가 팀원에게 전달하고 싶은 내용이 서로 달랐다. 그중 P가 가장 걱정하던 것은, 그들이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한 새로운 시안이었다. 나는 그들이 1가지의 새 시안만 보면 된다고 한 것으로 이해했는데 P는 2-3개로 이해했다. 


시간이 별로 없기도 했고,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일단 내가 주장하는 대로 1가지 버전만 넣어 이메일로 보냈다. 그쪽 부서에서 리뷰를 마친 후, 논의하고 싶은 것이 있다며 전화 미팅을 요청했다. 요청을 받는 순간 P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흘끗 보며 말했다. 


"시안 더 만들어 달라고 전화하는 거에 내가 5달러 건다." 




애초에 시안이 더 이상 필요할 이유도 없었고, 마지막 미팅에서 그들이 하나면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분명 듣기도 했다. 나로서는 어째서 2-3개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P는 어쩐지 반드시 2-3개여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전화 통화가 시작되고, 그들은 추가적인 수정을 부탁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시안이 하나라서 문제라는 말은 없었다.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P가 다급하게 그들을 붙잡았다. 


"저기 근데, 그 새 시안 2-3개 봐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쯤 되면 2-3개를 볼 생각이 없던 사람도 생각이 바뀔 법하다. 왜 저렇게까지 해서 이미 바쁜 자신의 팀이 더 많은 일을 하기를 원하는 걸까 의아했다. 


전화기 건너편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아니요 더 안 봐도 괜찮아요. 그거 하나면 충분해요." 


P에게 손바닥을 내밀며 5달러를 달라고 했다. 대답이 없었다. 




P의 소통 능력이 많이 부족한 것 아니냐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는 않다. 나름 유서 깊은 방송국, 뉴욕에 위치한 대기업이었다. 우리 부서가 맡은 채널은 해당 부문 미국 1위였고 전 세계에 콘텐츠를 팔고 있었다. 짜게 판단해도 소통 능력이 평균 이상 인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이 사건 이전에도 다른 프로젝트에서 비슷한 이유로 협업 중인 사람들과 부딪히는 일이 잦았고, 끝에는 주로 내가 옳았다. 임원들은 이 사실을 깨달은 이후부터, 우리보다 힘이 있는 타 부서나 그룹 사장의 피드백이 있을 시, 처리에 있어 내게 전권을 맡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단순한 것이 남들에게는 복잡했다. 내가 천재라거나 마법 같은 힘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영어를 못해 시각적 언어와 다른 오감에 의지하여 대화와 상황을 판단해 온 슬픈 세월이 쌓여, 어느 순간부터 소통에 써먹을 요긴한 기술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이전 19화 소통과 도약의 도구로 발돋움한 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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