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마음은 해냄
몇 년 전의 일이다. 점심시간,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C선배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너는 인생이 무난하잖아.“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 말이 좋은지 어떤지 모르겠다. 그저 ‘그런가’하고 생각했을 뿐. 생각해 보면 힘든 순간도 분명 있었지만 도저히 못살겠다 싶었던 적은 없었으니 그런대로 무난한 삶을 산 것도 같다.
그런데 거주지를 ‘부산’으로 옮기고 나서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무난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별로 어려움이 없다’인데, 나는 취업할 때마다 매번 어려움에 부딪쳤다. K팀장은 내가 서울에서 부산으로 생활지를 옮긴다는 이야기를 듣고 첫마디가 “뭐 먹고살려고?”였다. 나는 그때 까칠한 팀장의 말 정도로 여겼다. 그게 그 사람의 진심 어린 걱정이라는 것을 아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10년 넘게 했으니 내 경력은 어디서나 쓰일 데가 있다고 여겼다. 이력서를 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대개의 경우 내 경력을 부담스러워했다. 그게 아니면 “결혼했으니 자녀 계획이 있겠네요. 임신하면 그만둘 건가요?”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아이를 서둘러 낳을 생각이 없고, 멀지 않은 곳에 나를 도와줄 부모님도 계신다는 사실을 피력했지만, 그런 질문을 한 곳의 결과는 한결같았다. 나는 실업 급여를 꼬박꼬박 받으며 일할 만한 곳을 찾았다. 실업 급여 지급 기간이 끝나 갈 때쯤 한 곳에서 연락이 왔고, 나는 취직했다. 그 직장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인턴을 제외하고는 서울에서만 직장 생활을 한 나는 부산의 사내 문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수직적이고 위계질서가 강한 그곳의 문화는 나를 점점 주눅이 들게 했다. 우리 선배들이 얼마나 천사 같고, 건방진 나를 사랑으로 아껴주었는지, 부산에 와서야 깨달았다. 위계질서 속에서 나는 점점 말을 잃어 갔고 일의 즐거움도 모두 잊어버렸다. 일의 즐거움과 함께 얼굴의 미소가 모두 사라질 때쯤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 후로 나는 경단녀가 되어 버렸다.
나를 거절했던 회사에서는 하나 같이 임신 계획에 대해서 물었는데, 나는 자녀를 낳지 않은 채로 방황했다. 이력서에 생긴 3년간의 공백을 메울 새 없이 그저 시간은 흘러갔다. 그런데도 간간이 나를 불러주는 곳이 있었다. 이곳들의 특징은 예전의 내가 무엇을 했는지 중요하지 않다.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므로. 다만 긴 공백기가 있음에도 직장 생활을 오래 했으니 ‘알아서 잘하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로 나를 뽑았음이 틀림없다.
나는 그 ‘알아서 잘하겠지’라는 기대에 충족하고자 이리저리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그게 삽질일지라도. 일단은 하고 본다. 경단녀에게 필요한 것은 한 줄의 이력이라는 것을 잘 아니까. 그 한 줄을 채우기 위해서 오늘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내며 단절을 잇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