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당 환자는 가명이며, 본인이 특정되지 않도록 각색을 거쳤습니다.
“선생님, 저는 왜 이렇게 자주 속이 쓰릴까요.”
경숙 씨의 속쓰림은 참 알쏭달쏭했다. 속쓰림은 위염의 증상이다. 그런데 그는 위염을 생기게 하는 술 담배도 안 하고, 위에 안 좋은 매운 것, 기름진 것 안 먹는 ‘모범’ 환자이다. 왜 이렇게 속이 아플까? 마지막으로 짚이는 게 하나 있었다.
“혹시 신경 쓰는 일이 있으세요?”
그녀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말했다.
“아, 제가 무엇이든 완벽하게 하려는 습성이 있기도 하고, 요즘 일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아요”
“일 때문이요? 어떤 상황이 있었나요?”
“지금 상가 건물을 청소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관리사무소랑 자꾸 마찰이 있어요. 저는 최선을 다해 일하는데, 이것을 인정받지 못할 때 속이 좀 타요.”
경숙 씨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그는 자신의 성실함에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청소인력은 계속 줄어갔고, 할 일은 계속 늘어났다. 그는 끊임없이 일했지만 그녀가 청소하고 간 곳에 누군가 버린 쓰레기까지 다 살필 수는 없었다. 그가 미처 치우지 못한 쓰레기 한두 개는 민원이 되어 돌아왔다.
“저는 건물에 지내는 사람들과는 사이가 좋아요. 그분들도 제가 열심히 한다는 것을 알아주죠. 문제는 관리인과 민원이었어요. 관리인이 계속 민원이 있다고 말하면 저도 힘이 빠졌죠.”
그는 이후로도 병원을 방문할 때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아이고, 제가 시간을 너무 많이 뺏었네요. 그래도 선생님한테 말하고 나면 속이 좀 시원해요. 감사합니다.”
의사는 신비한 마법의 힘을 가지고 있다. 아픈 자의 말을 듣기만 해도 그에게 치유적 효과를 준다.
경숙 씨는 유독 기억에 남는 환자다. 나를 볼 때 그 반가운 기색과 호탕한 태도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풀어놨던 이야기 때문일까. 둘 다 인 것 같다. 경숙 씨는 약을 타러 온 환자이지만, 나는 그의 서사를 알고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 그는 늘 일에 있어서 성실했고, 그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일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내가 그를 응원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관리인은 그에게 무심했다. 관리인에게 경숙 씨는 단순히 청소노동자였으며, 주어진 임무를 완수해 내야 하는 사람일 뿐이다. 일이 많아졌지만 그에 상관없이 다 해내는 것이 기본이었고, 그러지 못했을 때 민원이 들어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건물 이용자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그는 보이지 않는 노동자이다.
관리인의 무심함은 경숙 씨의 속을 쓰리게 만들었다. 내 추측컨대 관리인은 경숙 씨를 특별히 미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사람의 노동과 시간을 돈으로 거래할 수 있는 사회 안에서 인력 관리의 역할에 충실한, 그러나 경숙 씨의 사정에는 무심한 사람이지 않았나 생각한다. 경숙 씨는 자신의 노동을 대가로 임금을 받는 사람이고, 따라서 청소 일을 완벽히 하는 것은 관리인에게 또는 고용주에게 당연한 것이었다. 그 청소 일이 얼마나 많은지, 사람의 작업이 과연 완벽할 수 있는지는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노동이 거래되는 사회 안에서 서로에게 무심하기는 참으로 쉬워진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무심하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거래의 당연함이 우리가 무심함을 자각할 기회를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사회 내에서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노동이 필요하다. 당장 나만 해도 그렇다. 식당에서 요리사가 만든 베트남 쌀국수를 먹고, 누군가가 만든 체육복을 입고 관장님이 운영하는 복싱장에 간다. 내 생활은 나의 노력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내가 아는 또는 모르는 사람들의 수고도 많이 들어간다. 우리 모두는 서로의 노동에 의존하며 살아가지만, 현대 사회 속에서 노동은 사람과 점차 분리된다. 사람들은 점차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돈으로 서비스를 사게 된다. 도움에는 제공에 대한 감사함이 있지만, 서비스에는 응당 받아야 하는 당연함이 있다.
내가 하는 일은 환자들에게 ‘도움’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 참 다행이다. 환자가 많아서 3시간 동안 쉬지 않고 말할 때는 기운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누군가가 몸이 나아지거나 마음의 위로를 받으면 그만큼 보람 있는 일이 없다. 나는 임금이라는 대가를 받으며 일하지만 일을 할 때는 환자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생각으로 한다. 내가 아는 환자가 계속해서 오고, 나와 그와의 관계가 두터워질 때 나의 노동은 서비스가 아니라 노력과 정성이 들어간 도움이 된다. 많은 환자들이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며 진료실을 나선다. 어떤 환자는 올 때마다 자신이 직접 뜬 수세미를 나에게 가져다준다.
사람에 대한 무심함은 그 사람을 납작하게 보도록 한다. 사람은 입체적이다. 다양한 이야기들을 속에 품고 있으며,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때그때 다른 면을 보여주는 육각형 주사위와 비슷하다고 생각이 든다. 노동을 서비스로 볼 때, 여러 면을 가진 사람이 하나의 면으로만 보이게 된다. 서비스라는 인식은 강해지고, 사람이라는 인식은 약해진다.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 무심함이 설 자리는 점차 좁아진다. 들음으로써 사람의 일면이 아닌 주사위 전체를 볼 수 있다. 나는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행운으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내가 무심함에서 조금 더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경숙 씨는 일터에서의 무심함에 대해 말했고, 그의 말을 들은 나는 내 무심함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내 무심함에 대해 무심하지 않도록 자꾸 귀와 눈을 열어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