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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하 Jul 19. 2023

딸의 삶에 관하여

가족이 아픔이 될 때


*상기 내용은 본인 동의를 받았으며, 환자가 말한 내용을 본인 특정 불가능하도록 각색했습니다.


접수에 [약처방]을 증상으로 띄운 환자가 왔다. 이전에도 한두 번 와서 복통 약을 타갔던 환자이다.

“아 이정아 님, 오늘은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

“선생님, 오늘은 감기 그런 건 아니고, 이전의 정신과에서 받았던 비상약을 받으러 왔어요. 가끔 두근거리고 숨 막히고 하던 일도 손에 안 잡히고 그래요. 정신과 다음 예약이 4일 정도 남았는데, 불안 증상이 갑자기 찾아올 때 먹는 약이 다 떨어졌어요. 병원에 전화하니 오늘 환자가 꽉 차서 방문이 불가능하다고 해서요.”

“그래요. 먹던 약이고 꼭 필요한 상황이니 처방해 드릴게요. 가능하면 다니던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하는 것이 좋아요.”

“네, 알겠습니다.”

그가 한숨을 쉬었다.

“선생님, 제가 나아질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가족 때문에 우울과 불안 증세를 보여 계속 약을 먹고 있거든요. 그동안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부모님 집을 다녀오고 다시 감정이 무너져 내렸어요.”

그의 얘기가 이어졌다. 마침 다른 환자가 없는 상황이라 이야기를   들을  있었다.


이정아 씨는 가족 안에서 세 살 차이 나는 오빠를 위로 둔 딸이다. 그의 오빠는 1년 전 결혼했다. 나이가 30대 초반인 정아 씨에게 부모는 결혼만을 바라고 있다.

“4년 정도 된 애인이 있는데, 이번에 집에 갔을 때 7시간 동안 남자친구와 결혼을 왜 하지 않느냐며 저를 다그치더라고요.”

그가 대학원에 가겠다고 하자,

“여자애를 대학에 보내는 게 아녔어. 괜히 눈만 높아져서 시집은 안 가고 공부하겠다는 소리나 하고 있어!”

라는 꾸지람을 들었다. 그에게는 가족이 고통이었다. 가부장적인 부모 아래서 그는 순종적인 딸의 역할을 강요받았다.

“저를 결혼시키는 것이 해치워야 할 과제라고 생각하시더라고요.”

자녀가 과제가 되다니. 나 또한 자녀의 삶을 살아왔기에 무섭게 느껴졌다. 나 또한 과제였을까? 이정아라는 사람보다 가족 내 딸이라는 역할에 초점이 맞춰질 때, 가족은 비극이 된다.

“최근에 제가 다니던 정신과 선생님에게 공황장애라고 진단받았어요. 어릴 때부터 보호해 주는 사람 없이 지속적으로 가정폭력에 노출되어 온 경험이 공황장애라는 결과로 나타나지 않았나 생각해요. 참 속상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네요. 나를 만든 것도 가족이지만, 나를 죽이는 것도 가족일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가족이란 무엇일까?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 끈끈하게 이어진 정. 겉에서 본 가족의 이상적인 모습이다. 모든 가족은 어떤 식으로든 아프다. 가부장적인 가족은 더 그렇다. 가족 구성원들이 평등하지 못한 채 한쪽의 의견만 우세할 때, 다른 쪽은 고통을 받는다.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는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 없는 사이,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는 서로에게 뾰족한 존재, 끈끈하게 이어진 정은 그를 통한 강요가 된다.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가족들에게 끊임없이 압력을 받는 상황이네요. 제가 말씀드리기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가족과의 연이 정아 님을 아주 힘들게 하는 것 같네요.”

“저도 그걸 아는데, 어렸을 때부터 세뇌당해서 그런지 저 또한 부모님의 말씀처럼 가족끼리는 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이번에는 제가 좀 더 대든 편이에요. 아버지의 말씀을 거슬러 대학원에 간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으니까요.”

“이정아 님에게는 큰 변화이겠군요. 그런 변화를 스스로 만들어 나간 것이 대단해요.”

처방 화면에 그가 먹던 약들을 입력했다.


그가 떠나기 전에 말했다.

“이전에 아이를 꼭 갖고 싶었는데, 지금은 반반이에요. 제가 자라온 힘든 상황을 다시 반복할까 봐 걱정되어요.”

“아이를 낳고 안 낳는 것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선택이에요. 다만 괜찮다면 제가 한 말씀드리고 싶어요. 이정아 님은 자신의 인생을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태어난 가족이, 부모가 준 상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마음은 그 자체로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줘요. 정아 님은 괜찮은 사람이에요. 자신이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실에 깨어 있으면 자신이 묶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마음이 좀 편해졌어요.”

“그래요, 잘 계시다가 다음에는 감기 같은 거로 오세요.”

그가 진료실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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