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 독립 일기 02
가계약금 입금 후 받은 문자 메시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아파트 매매 계약
00시 00구 00동 00 아파트 00동 00호
(중략)
매도 매수 합의 하에 계약하기로 하고 매수인은 계약금(매매예약금)일부금 0백만 원을 아래 매도인 계좌로 송금 후 계약 성사로 보고 배수인 파기 시 선입금액 포기, 매도인 파기 시 수령액 배액 상환으로 해지할 수 있다.
계약일은 금요일 7시입니다.
"만약에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어린 왕자의 명대사가 이렇게 변형되어 내내 맴도는 날이다.
"만약에 내가 오후 일곱 시에 아파트 매매 계약을 한다면 나는 오전 열 시부터 붕 떠 있을 거야"
업무를 하다가도 힐끔, 점심을 먹다가도 힐끔, 회의를 하다가도 힐끔 시간을 확인했다.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찾은 당일날 바로 가계약을 하고 이틀 뒤인 오늘, 매도자와 만나 계약을 하기로 했다. 가만히 있어도 흐르는 것은 시간이고, 가계약금을 넣어놓은 집이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그랬다. 꼭 소개팅을 앞둔 마음 같다. '그 집에서 지냈던 분이 어떤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괜찮은 분이었으면 좋겠어요' 하고.
"주말 잘 보내세요"
아직 계약서도 제대로 작성하지 않았는데 입에서 줄줄 설레발을 떨 말이 나올까 봐 여느 때처럼 상투적인 금요일 인사말만 던진 채 곧장 퇴근했다. 막힐 시간 직전에 출발한 덕에 집에 일찍 도착했다. 꽉 막힌 도로에서 시간을 허비한 뒤 제시간에 맞춰 사무실에 도착했으면 했는데. 시간을 더디게 보내려고 하면 꼭 이렇게 도로가 뻥뻥 뚫린다.
텔레비전을 보다 시계를 한 스무 번쯤 확인한 뒤 드디어 일곱 시를 5분 앞둔 시간이 되었다. 편안하게 갈아입은 옷을 다시 출근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아서였다. 매매 계약엔 특별한 서류가 필요 없었기에 인감도장 하나와 매도자에게 계약금을 입금할 핸드폰만 잘 챙긴 채 집을 나섰다.
"안녕하세요"
"어머 딱 맞춰 오셨네. 여기 앉아요."
이틀 만에 다시 들어선 공인중개사 사무실은 여전히 후덥지근했다. 손부채질로 땀을 식혔다. 매도자가 조금 늦을 거라며 리모델링을 할 거면 꼭 여러 업체의 견적을 봐야 한다는 것, 특히 00 같은 유명한 곳은 꼼꼼하게 보지 않고 대충 하는 경우가 많다고, 이전에 어떤 집은 몰딩 하나 제대로 없애지 못했다며 이름값으로 업체를 정하지 않아야 한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자녀분과 내가 비슷한 또래라고 했었는데, 그래서 더 설명이 길어지나 싶었다. 가계약을 한 날부터 오늘까지 내내 인테리어 업체를 추리고 있단 얘기는 굳이 꺼내지 않았다.
"아이고. 늦어서 죄송합니다. 차가 많이 막혀서"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한 팔에 업무 수첩을 낀 채 핸드폰 쥔 중년 남성이 사무실에 들어왔다. 몸을 반쯤 일으켜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생활감이 묻어 있는 재킷에 표정 주름이 패인 얼굴. 내가 매도자의 첫인상을 생각하고 있는 사이 그는 땀을 닦은 뒤 공인중개사에게 이다음 절차 등을 가볍게 묻곤 시선을 돌렸다. 역시 금액이 조금 클 뿐, 물건을 사고파는 일과 다름 아니다. 상대에 대해 궁금해할 필요가 없는.
계약서를 출력해 온 공인중개사가 테이블 상석에, 나와 매도자는 그 양 옆으로 마주 앉은 상태였다. 공인중개사는 계약서를 천천히 읽으며 주요 부분을 다시금 환기시켰다. 등기부등본상 하자 없음과 잔금 일자 같은 일반적인 내용에 잔금일까지 누수 하자 담보는 잔금일로부터 30일까지 매도자 부담으로 하며, 노후로 인한 소모적 하자는 매수인이 현 상태로 인수하는 점, 계약금 입금 후 내부 수리에 동의하며 수리일부터 관리비 포함 모든 책임은 매수인이 진다는 점 등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공인중개사의 도장과 매도자의 도장이 이리저리 찍힌 다음이 내 차례였다. 내 도장은 공인중개사의 손에 들려 어디에 어떻게 찍히는지 모르게 여러 장으로 겹친 계약서 사이사이에 빨간 자국을 남겼다. 케이스에서 꺼낸 큼직한 한자 도장 사이 세로로 긴 형태의 막도장(나는 어렸을 때 기념으로 만든 막도장을 인감으로 설정했다. 누가 봐도 인감처럼 안 생겼기 때문이다) 자국이 비스듬히 남았다. 다시 어디에 사인하는지 모르게 여러 곳에 프린트된 내 이름 옆에 다시 한번 수기로 사인을 했다. 매도자 명의의 통장에 가계약금을 뺀 나머지 계약금을 입금했다.
"인테리어 공사 시작 날짜 나오면 연락 줘요. 그때부턴 수도세랑 전기세, 본인 앞으로 돌려야 하거든"
부모님이 부동산을 나 모르게 소유하고 있을 경우 취득세를 내는 비율이 달라질 수 있으니 전입신고는 미리 하는 게 좋다고, 중개 보수비는 잔금 전까지 입금하면 된다는 설명 뒤 집 열쇠를 받았다. 궁금한 게 있으면 연락드리겠다는 인사를 한 뒤 사무실을 나섰다. 공인중개사 공제 증서가 한 장 덧붙여진 계약서 원본을 가방 안에 잘 챙겼다. 시간을 확인하니 겨우 7시 30분이다. 집을 둘러보고 가계약을 하는 데까지 3시간이 채 안 걸렸는데, 매매 계약서 원본을 품에 안고 나오는 데엔 30분이 채 안 걸렸다.
어떠한 뜻을 강조하기 위해 말의 차례를 뒤바꾸어 쓰는 문장 표현법을 도치법이라고 한다. 그러니 내내 생각했던 이 문장을 강조하려면 이렇게 바꾸어야 한 순간이다.
물건을 사고파는 일과 다름 아니다. 돈만 있다면.
계약서 같은 문서를 다들 어디다 보관하나. 마땅한 서랍이 없어 가방 안에 계약서를 그대로 둔 채 와인을 꺼내 왔다. 아무렴 어떠랴. 내일의 내가 열 일하며 대출 갚겠지. 지금의 내가 저지른 일을 내일의 내가 수습하겠지. 내일의 나를 내가 열렬히 믿어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지름을 한 날. 이런 날 한 번쯤은 시원하게 외쳐줘야지. 내일의 나를 위해, 미리 치얼스.
월요일 오후 2시. 주택공사 디딤돌 대출 신청을 위해 은행을 찾았다. 외부 미팅에서 돌아오고 있는 담당자를 기다리며 은행 내부를 둘러봤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직원들 뒤로 직장인을 위한 복리 적금이니, 펀드니, 예금이니 하는 글귀들이 큼지막하게 쓰여있다. 퍼센트 앞에 붙은 숫자를 보며 생각했다.
내 통장은 왜 텅장일까.
1. 무노동 무임금이 원칙인 파업이 입사 이래 두 번 있었다. 총 합 해 8개월쯤 됐을까. 씀씀이는 그대론데 월급은 없었다. 도돌이표 같은 카드 빚이 이때부터였지.
2. 휴가는 무조건 해외로. 이따금씩 비즈니스 클래스 항공을 탔고 5성급 호텔을 자주 찾았다. 달콤했었다.
3. 명품백을 일시불로 지르기도 했었다. 차가 없어 명품백은 애지중지 방 안에 두었고, 들고 다닌 버릇 안 하니 경조사가 있을 때만 겨우 꺼내 든다. 이게 몇 개 있더라.
4.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야금야금 시켜 먹은 배달 음식과 와인, 수많은 저녁들. 배달의 민족을 지웠다가 다시 깔았다를 몇 번 했지.
5. 덕질. 현재 진행형. 이건 패스.
통장이 애초부터 텅장이었게. 다 내가 만들었다.
필요 없는 경험은 없다. 따라서 지나온 시간과 씀씀이에 대한 후회는 없다. 그러나 지출의 방향이 달라질 시점이 도달했다. 아쉽지만 어쩌랴. 집값만큼 기회비용이 존재함은 당연한 진리일지니.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까만 뿔테 안경을 쓴 담당자가 명함을 건넸다. 직장인을 위한 복리 적금이니, 펀드니, 예금이니 하는 단어들에서 눈을 뗐다. 나도 습관처럼 명함을 꺼내 건넸다.
대출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이어졌다. 주택공사의 디딤돌 대출이기에 은행에서 별도의 수수료를 받는 것은 없고 매매 계약금액과 국민은행 부동산 시세 값을 비교해 더 낮은 쪽의 금액이 대출의 기준이 되며, 디딤돌 대출은 집값의 70%으로 매매 계약서 잔금일에 맞춰 지급이 되게끔 진행될 것이란다.
내 공인인증서가 담긴 USB를 은행 노트북에 연결했다. 디딤돌 대출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은행 상품이 아니기에 자신이 직접 주택공사 홈페이지에서 대출을 신청할 수 있다. 그러나 대출에 문외한인 나는 모르는 단어나 원리금 상환 시 각 옵션 별로 갚는 일정 등을 담당자에게 직접 물어볼 수 있기에 은행을 찾은 것이 훨씬 편했다. 특히 대출이 확정된 이후 딱 한 번 매달 대출금이 빠지는 날짜를 바꿀 수 있다는 정보(월급일 이전으로 지정되면 무척이나 피곤해진다)를 얻었고, 혹시 신용 대출이 추가로 필요할 경우 한도가 얼마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대출 범위와 이자를 결정할 소득 수준, 부동산 소유 여부, 부양가족 숫자 등의 요건들을 내 환경에 맞춰 등록했다. 챙겨 온 제출 서류는 담당자가 따로 챙겼고, 36회 이상 납부한 청약 통장 내역서의 팩스 발송을 따로 요청하는 것으로 대출 접수가 완료됐다. 담당자의 빠른 손놀림으로도 신청이 1시간 가까이 걸렸는데, 이걸 혼자 했으면 2,3시간은 훌쩍 넘었겠다 싶다.
"대출 심사가 되는 동안 문자가 많이 올 거예요. 잊지 말고 자주 체크하시고, 저한테도 메시지를 복사해서 보내주세요."
다음 달에 한 번 은행을 찾을 일이 있을 거고, 이후 대출이 시행되는 날 본인이 실행 버튼을 눌러야 하기에 그때도 다시 한번 연락하게 될 거라는 과정을 설명해주었다. 내 서류를 처리하는 동안 다른 분들의 서류도 군더더기 없이 처리하는 담당자의 설명이 믿음직스러웠다.
한낮의 태양이 작열하는 오후. 은행을 나와 근처 카페에 들어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다다음달부터는 원리 상환금을 처음부터 월급에서 제하고 남은 금액만 월급으로 생각해야 한다. 관리비도 나갈 거고, 생필품이며 갑작스레 돈 들어갈 일들이 생기겠지. 쪼록. 오늘따라 커피가 쓰다. 진정한 독립의 맛이다.
집이 지어지고 나서 지금까지 손 한 번 안 대고 쭉 살아온 곳이라, 처음부터 전체 리모델링을 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은행을 다녀온 뒤 인스타그램과 블로그 등을 통해 눈이 빠지게 검색해 정리한 지역 인테리어 업체에 견적 요청을 시작했다. '무조건 여기다' 했던 곳은 평당 가격에 기본 확장 비용, 거기에 추가로 들어갈 금액을 얼추 잡으니 내가 세운 예산의 정확히 두 배였고, 예산보다 저렴하거나 비슷하게 받은 견적들은 말 그대로 아주 기본만 하거나 그마저도 촌스러운 무늬들이 가득했다.
아, 어쩌란 말이야 트위스트 추면서
추리고 추려 열 개 정도로 압축해놓은 업체 리스트가 쓸모 없어졌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이다.
숨고(숨은 고수) 어플과 팔로워가 많지 않은 인스타그램들을 다시 뒤졌고, 그중 포트폴리오를 게재해 둔 블로그가 연결된 곳들 위주로 봤다. 내가 원하는 스타일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역으로 내게 스타일을 제안할만한 곳들인지 파악하려면 포트폴리오 확인은 필수였다.
하얀색 일색에서 벗어나 주황색과 분홍색 등 타일 배색을 예쁘게 하는 업체 하나와 전반적으로 화이트 톤으로 맞춘 스타일에 전체 리모델링 가격을 아예 공개한 업체 등으로 새롭게 리스트업 했다. 특히 전체 리모델링 가격을 공개한 업체는 우리 아파트 단지에서 진행한 리모델링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있었다. 아파트를 미리 파악해본 것만큼의 장점이 어디 있을까. 여긴 특별 체크. 다시 만들어진 리스트의 특징은 생긴 지 오래지 않고 주로 2,30대의 젊은 대표가 운영하는 곳들이었다. 취향이란 게 사실 다 거기서 거기다.
한 업체와 통화를 해 현장 미팅을 잡았다. '마침 근처에 있는데 오늘 오후에 괜찮으신가요?' 한마디에 바로 잡힌 미팅이었다. 아파트 입구에서 인테리어 업체 대표와 만났다. 새시 교체, 베란다 확장 등 주요 포인트들을 확인한 뒤 최소한으로 잡은 견적과 욕심을 부린 견적 두 개를 받아보기로 했다.
처음부터 빈 집을 보고 계약했는데 오늘에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공인중개사와 방문했을 땐 해가 뜨는 방향이나 주변 환경, 시세와 방 크기 등을 체크하느라 보지 못했던 눈에 띄게 바깥으로 나온 도시가스 배관이나 타일로 가려지지 않을 화장실 밸브함, 냉장고 놓을 애매한 위치.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관점은 충분히 달라진다.
이틀 뒤 견적서가 2부 도착했다. 하나는 예산보다 낮게, 하나는 예산을 다소 초과하는 걸로. 예산보다 낮은 견적서는 깔끔하게 기본으로 진행하는 것이었고, 예산을 다소 초과한 견적서는 새시도 전부 교체에 앞 뒤 베란다 확장, 천장 댄조 작업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조금 욕심을 부려도 될 듯싶다. 구두상으로 견적을 물어본 다른 업체와는 더 미팅을 잡지 않기로 결정했다. 구두상으로 물어본 금액이 이미 '다소 예산을 초과한 견적'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편한 시간대 알려주시면 사무실 방문하겠습니다.'
사무실에 방문해 견적 내용에 대해 세부적으로 물은 뒤 계약을 진행하기로 했다. 금요일 저녁으로 미팅이 잡혔다. 다시 금요일이다. 나를 한 단계 한 단계 독립에 가까워지게 하는 요일.
구입 예정인 가구와 가전 사진을 그때그때마다 담당자에게 보여주고, 내가 원하는 스타일에 대해 거의 매일 연락을 주고받으며 콘셉트를 잡고 있다. 공사 시작일은 마지막 주로 잡혔고, 그전까지 3D로 구현한 인테리어를 보며 계속 수정 보완해 나갈 예정이다.
꾸미고 닦는 일은 한참 남았고, 혼자 사는 것에 대한 로망은 그 이후에 실현될지니. 오늘도 눈 빠지게 마음에 드는 인테리어 사진을 찾아 헤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