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 독립 일기 05
"000 고객님 맞으신가요? 주문하신 가구 내일 오전 7시 30분쯤 배송되는데, 댁에 계실까요?"
"네! 괜찮아요. 집에 있습니다."
"네, 그럼 내일 배송 기사님이 시간 맞춰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넷 설치 기사님과 거실의 셋톱 박스 위치를 조정하던 중에 걸려 온 전화. 주문한 그릇장이 내일 아침 일찍 배송이 된다는 확인 전화였다.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모아 온 스타벅스 유아히얼 머그와 텀블러를 한 곳에 담아놓기 위해 눈알이 빠져라 며칠을 검색해 겨우 고른 그릇장이었다. 리모델링이 끝난 직후에 맞춰 가구와 가전 배송을 몰아 예약했더니 최근 휴대폰 통화 목록이 대부분 등록되지 않은 11자리 숫자들이다. '문 앞에 두고 가세요' 혹은 '경비실에 맡겨주세요'가 되지 않는 가구 배송 특성상 사전 해피콜과 당일 확인 전화가 걸려 왔고 그걸 꼭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 오전엔 인터넷과 정수기를 설치하고, 오후엔 침대와 매트리스, 옷장을 배송받는다. 여름휴가의 시작이었다.
TIP.
주문 제작 및 배송에 최소 2주 이상 소요되는 가구는 미리 주문해놓는 것이 좋다. 여유 있게 주문하면 받고 싶은 날을 지정할 수도 있다.
나는 계획형 인간이다. 요즘 유행하는 MBTI 검사를 하면 다른 건 조금씩 바뀌더라도 계획형인 'J'는 빠지지 않고 나온다. 현재 시간이 3시 47분이면 '4시부턴 텔레비전을 끄고 청소를 해야 하지' 하고, 이번 주말엔 '00 영화를 오전에 보고, 점심을 00에 가서 00을 먹고, 오후 3시엔 서점을 들렀다가 4시까진 집으로 돌아와야지' 한다. 게다가 실행도 빠르다. 얼마나 오래 지속하는지는 이후의 것으로 남겨두고 일단 '해야 한다' 혹은 '하고 싶다'란 마음이 들면 '일단' 시작한다. 사고형이자 계획형인 동시에 시도에의 충동이 강한 사람이 독립을 하게 될 땐 모든 일정이 확실히, 내 손안에 있어야 한다.
요즘 유행하는 <오늘의 집>도, 그곳에서 자주 언급되는 가구 브랜드도, 소품들을 모아놓은 웹사이트들도 몇 번 보다 보니 다 그게 그거 같아질 즈음, 내가 꾸리고 싶은 집의 형태가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리모델링이 끝나는 날짜에 맞춰 배송이 될 수 있도록 나는 바로 가구 결제를 시작했다.
그간 야금야금 모아 왔던 바이닐이 한쪽에 모아져 있고, 중심은 이거다 싶을 정도로 크고 무게감 있는 텔레비전과 아주 푹신하진 않아 그렇기에 그 자체로의 기능을 할 소파와 글을 쓰고 와인 마시고 괜히 앉아 있고 싶은 테이블이 자리한 거실은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낼 곳이 될 거였다.
TIP.
잘 활용하면 훨씬 더 경제적일 수 있는 2 in 1 에어컨보다 스탠드 에어컨 하나를 사는 것으로 가전 구매 가격을 낮춘 것은 이런 생활 반경에 따른 결정이었다. 단순히 가격을 비교하는 것보다 자신의 생활 패턴을 분석하는 것은 모든 구매에 선행되어야 하는 일이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거실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다 잠만 청하러 들어갈 침실은 혼자 눕기 적당히 넓을 퀸사이즈 침대와 장식장 하나만 놓기로 했다. 옷방엔 하얀 옷장과 하얀 서랍장을 골랐다. 많은 옷을 걸 수 있는 시스템장은 옷이 드러나는 특성상 아무리 깨끗하게 관리해도 지저분해 보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기존에 쓰고 있던 하얀 협탁 서랍장은 버리지 않고 챙겨 올 예정이라 옷방에 넣으면 색감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가로 사이즈에 딱 맞는 책장 두 개에 디자인 체어 하나가 놓여 편안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분위기. 문을 없애 개방감을 택한 방은 나름의 서재로 꾸밀 생각이었다. 와인 셀러도 이 옆에 넣으면 딱이겠다 했다. 각 방에 대한 콘셉트가 정해지니 가구를 고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긴 장마 덕에 더디게 진행되는 리모델링 현장을 중간중간 체크하며 가구와 가전 결제를 모두 마쳤다. 그리고 가구와 가전 배송을 몰아넣은 한 주에 맞춰 휴가를 냈다. 여행이란 목적 없이 일주일의 여름휴가를 낸 것은 입사 후 처음이었다.
가구와 가전 배송에 J형인 내 계획이 적용됐다. 월요일 오전, 전체 가구와 가전 중 제일 먼저 에어컨이 배송됐다. 더운 여름, 가구를 배송하고 조립하는 배송 기사님들이 그나마 에어컨이 켜 있으면 덜 힘들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월요일 오후, 에어컨 다음으로 TV와 냉장고, 세탁기가 동시에 배송됐다. 그나마 텔레비전 소음이 있으면 역시나 가구를 배송하고 조립하는 동안 덜 어색하지 않을까 싶어서였고, 시원한 냉장고에 담아놓은 음료수라도 건넬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침대와 소파, 옷장과 그릇장, 서랍장이 순서도에 따라 각각 요일별로 도착했다. 미리 주문해 본가에 받아두었던 소파 테이블과 식탁, 의자는 중간중간 가져다 놓았고, 인덕션과 얼음정수기, 인터폰도 중간중간 설치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 취향인 것들로 배치한 집을 만들어가는 과정. 여행이란 목적 없는 여름휴가는 처음이었지만, 이런 여름휴가도 처음이었다.
가구가 배송되고 남은 시간은 본가에서 직접 짐을 옮겼다. 침대나 책상 같은 가구는 모두 새로 사니 옷이나 덕질 용품, 책 정도는 직접 옮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언제나 현실은 항상 상상을 뛰어넘었다. 바로 옆 옆 동이라 걸음으로 5분도 안 되는 거리인데 습하게 푹푹 찌는 한여름은 캐리어를 끌고 몇 번 왕복하고 나면 모든 진이 빠지게 했다. 일부러 짐을 옮기러 화물 캐리어도 새로 샀는데 두어 번 쓰고 나서 바로 던져버렸다. 어설픈 운전 실력으로 짐이 떨어지지 않게 붙잡으며 울퉁불퉁한 아파트 단지를 다니는 것이 훨씬 더 불편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캐리어에 싣고, 차에 싣고, 직접 핸드 캐리 했다. 보통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하면, 되었다.
유튜브로 연동한 에어팟에선 내내 90년대 댄스곡 같은 제목의 논스톱 음악들이 흘렀다. 고작 몇백 미터 떨어져 있는 동이었지만 하루 걸은 걸음이 기본 만 보였다. 생각해보면 지난 여름 휴가들도 늘 이랬다.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애써 고르고 고른 호텔에선 지친 다리를 쉬게 하느라 침대 위를 떠나지 않았다. 그런 의미를 따지니 여름휴가는 여름휴가긴 한 것 같다고, 그 생각을 잠깐 했다. 별도의 비용을 들여 와인 셀러까지 옮기고 옷 정리를 마치고 나니 어느새 금요일 오후. 일주일의 휴가가 이렇게 끝이 보이고 있었다.
TIP.
가구와 가전 배송을 한 주에 몰았더니 배송 기사님들이 겹치는 경우가 많았다. 옷장 조립이 끝날 즈음에 책장이 배송 오고, 인덕션 설치와 인터넷 설치가 동시에 되었다. 혼자 독립하는 티가 덕분에 상쇄되었다. + 배송, 설치 기사님이 나를 '사모님'이라 칭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혹시나' 하는 걱정을 더는 팁이다.
토요일 저녁. 가족들과 외식을 하러 집을 나섰다. 휴가로 문을 닫은 식당들이 많아 외진 곳에 있는 고깃집으로 향했다. 해외나 시외로 여행을 떠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식당에 가득했다.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메뉴를 시키고 먼저 소주를 주문했다. 엄마와는 몇 달만에 함께 한 식사자리였다. 동생이 중간에서 소주를 각각 따라주고, 건배를 청했다. 한 잔 두 잔, 소주 한 모금에 고기쌈을 먹던 중. 창문 너머에 시선을 둔 엄마가 내게 '대견하다'라고 말했다. 동생이 언니는 차도 있고 집도 있는 사람 아니냐 했고, 나는 사람의 말 한마디가 많은 것을 해낸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가 계산을 마친 뒤 조카를 데리고 먼저 산책을 나갔고, 나는 동생과 남은 소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다 마셨다. 독립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이사를 한 건 아니지만 일요일 점심, 내 집에 가족 다 같이 모여 자장면을 먹었다. 아직 식기류를 다 갖추지 않아 파스타 접시가 앞접시를, 국자가 스푼을 대신했다. 집 구경까지 마친 가족들이 오후에 돌아간 뒤 배달 음식 그릇을 치웠다. 그리고 혼자가 되었다. 조카가 만지는 것을 못하게 하려고 치워두었던 매니큐어를 꺼내 와 오랜만에 바르고, 한 달간 무료 시청이 가능한 영화 채널을 켜 개봉 시기를 놓쳤던 영화 한 편을 봤다. 많은 것을 한 것 같은데도 고작 늦은 오후. 와인 셀러에서 와인을 꺼내 왔다. 짧고 굵게 흐른 독립 과정을 반추하는 감상은 접어 두고, 앞으로 글도 쓰고 책도 읽고 텔레비전도 보고 편히 지낼 내 집에서 혼자 자는 진정한 독립의 첫 날밤을 기념한다.
나를 위해 치얼스.
생각보다 변화는 금방 적응된다. 아파트 층수를 본가 층수로 누른 몇 번의 실수를 제외하면 회식을 하고 들어오는 취한 걸음에도 집을 찾아오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분리수거를 하는 길과 주차하는 자리에도 익숙해졌다. 물티슈를 손에서 떼지 않고 조금만 먼지가 보여도 청소기를 돌리는 예민한 감각도 생겼다. 생각처럼 퇴근 후 시간을 규칙적이고 다양한 활동을 하며 보내고 있진 않지만, 집들이로 친구를 초대해 편히 와인을 마시고, 보고 싶을 때에 보고 싶은 영화를 틀어보는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그리고 이 글은 거실 테이블에 앉아 쓴다. 이제 굳이 글을 쓰기 위해 주차하기 편한 카페를 찾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커피를 찾아 마실 필요가 없어졌다. 그것만으로도 독립의 충분한 가치가 있다.
아래는 현재 집 사진 중 일부다. 내 현실적인 고민이 충실히 묻어난 공간이다. 물론 독립 일기는 조금 더 연재될 예정이다. 고작 일주일 만에 이런 글을 썼으니, 한 달 뒤엔 더 많은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거라 감히 믿어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