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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 Sep 17. 2024

제가 원래 좀 느려요

첫번째 핑계 : 늦장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게으름에 대해 한가지 풀고 가야할 오해가 있다. 어쩌면 당신도 막연하게 해오던 오해일지도 모르겠다. 이건 어떤 ‘동물’의 지분이 크다. 여기서 영화 <주토피아>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면, 내 예상이 들어맞았겠다. 나무늘보 공무원 캐릭터가 느릿느릿 무슨 서류에 도장을 꾸우우욱 찍는 장면. 일상적인 상황이나 긴박한 상황이나 시종일관 굼뜨다. 나무늘보는 실제로 그 느릿한 행동거지 때문에 ‘Sloth(나태, 게으름)’이라는 영어 이름이 붙었으니, 마냥 현대에 와서 완성된 오해는 아니다(우리말 ‘늘보’ 또한 게으른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바로 게으름이란 ‘느리다’라는 오해.


그런데 이게 얼마나 성의 없는 짐작이냐면, 일단 표정부터가 다르다.

진짜 게으른 사람들의 얼굴을 한 번 보라. 늘상 느긋한 미소나 짓고 있는 나무늘보와 달리 항상 조급한 표정이다. 내가 본 그들은 늘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습관처럼 일을 미룬 탓이다. 이제 이들은 아주 빠르게 일을 처리해야만 한다.

그럼 미뤄서 확보한 시간 동안은 여유로운가? 별반 다르지 않다. 실시간으로 높아지는 일의 난이도를 지켜보며 심란해져만 가는 중이다. 그러나 나무늘보는 일을 미루는 게 아니라 그저 일정한 속도로 아주 느릴 뿐이다. 그러니까 느림보와 게으름뱅이는 사실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다.


나의 경우가 반증이다. 나는 게으른 사람이지만 전혀 느리지 않다. 말도 성격도 남들보다 급해서 차라리 빠름보(?)에 가깝다. 그래서 자주 ‘게으르긴 뭐가 게을러요’ 같은 소리를 듣는데, 같이 일을 하다보면 그들 또한 얼마 가지 않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느리지 않으면서 게으른 사람의 가장 큰 애로사항은 바로 이 오해다. ‘아니 왜 마음 먹고 하면 빠릿빠릿하게 해낼 사람이…’라는 식으로, 기대에 대한 실망을 주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게으름에 대한 ‘괘씸죄’까지 가중되어 버린다. 이럴 거면 차라리 ‘제가 원래 손이 좀 느려서요’ 하면서 납득 가능한 핑계라도 댈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다고 일부러 원래 행동이 느린 척 할 생각은 없다. 난 느린 건 딱 질색이다. 그럼 사람들 말대로, 얼른 해치울 수 있으면서 왜 게으르게 구는 걸까? 나름대로 변명을 하자면, 사실 나는 일종의 효율을 연구하는 것이다. 차곡차곡, 천천히, 부지런하게 시간을 들이는 방법 말고도 더 효율적인 방법이 어딘가 있을 것 같다. 예컨대 일을 시작하기 전 쌓아둔 웹툰을 얼른 정주행해서 업무 의욕을 예열하는 일(?), 아주 촉박한 시점까지 일을 끌고 가서 극한의 집중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일(??) 같은, 효율의 지름길 말이다. 당장 이딴 예시들 밖에 떠오르지 않아 유감이다. 그렇지만 반드시 나에게만 적용되는 최적의 능률 공식이 존재할 거다.


아니, 오히려 무슨무슨 법칙에 따라 50분 일하고 10분 쉬는 게 최적이다- 같은 가이드가 더 이상하지. 모두에게 적용되는 ‘효율의 절대방정식‘이라는 게 있을 수가 있나? 사람마다 집중력의 정도나 방해요인, 심지어 업무의 유형도 다 다를 텐데. 그러니까 결국 게으름이란 건 어떤 부도덕이나 불량한 태도 같은 게 아니라 그저 개인차가 아닐까. 행동이 빠르고 느린 정도의 차이처럼. 사람마다 자신의 일하는 템포에 맞춰 최대 효율 지점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거다.




일단 나는 아직 못 찾았다. 효율이 엉망이다. 매번 시간을 가불해서 늦장을 부리고 그만큼 값비싼 후회를 지불한다. 가불한 시간 동안이라도 즐거웠다면 좋았겠지만 나는 늦장을 부리는 내내 똥 마려운 개 같은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아, 나무늘보가 야속하게 느껴진다. 같은 게으름뱅이 취급 받는 신세면서 저렇게 여유로운 표정이라니.

아마 나무늘보야말로 자신의 최대효율을 찾은 모양이다. 그딴 답답한 속도로 몇 만 년동안 용케 멸종 안했으니, 그 노하우는 환경에 자기 템포를 맞춘 가장 자기다운 라이프스타일에 있는 셈이다. 언젠가 나도 찾을 수 있을까? 내 최대 효율을. 내 템포대로 노련하게 살아가는 나만의 표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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