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울려고 쓰는 글 (1)

외삼촌을 그리워하며

by 김보


외삼촌이 돌아가셨다. 열흘 전 쯤 LA의 숙모에게서 온 카톡이었다. 코로나 합병증으로 생사를 넘나드시던 것이 꼬박 한 달 반 째였다. 처음엔 내 주변 사람도 코로나가 걸리는구나하며 철 없이 신기했다가, 미국은 코로나 치사율이 높다는 소문에도 고생 많으시겠지 정도의 걱정이었다. 워낙 풍채가 좋으시고 활동적이던 외삼촌이라 비보는 충격이었다. 그러나 더 큰 충격은 내 마음이었다. 외삼촌이 이 세상에 없다는데 마음이 크게 슬프지 않은 것이다. 마치 회사에서 당연히 흘러가는 몇 가지의 일들처럼 느껴진다. 이런 기분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봇승이 왔나?’ 부산 댁에 내려갈 때면 항상 날 참 좋아해주시던 친할머니께서 재작년 갑작스레 돌아가셨을 때에도, 장손으로 운구까지 맡았건만 마음이 이상하게 무덤덤했다. 뻔한 신파극에도 매번 순순히 내주던 눈물이면서 주변에 대한 일에는 왜 그리 인색한지, 내가 외삼촌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길 바라며, 이 글은 내가 울기 위해 쓰는 글이다.


어린 기억 속 그는 그저 ‘엄마의 오빠’였다. 내가 여섯 살 때 목사 공부를 하러 미국에 영영 가신다 했다. ‘삼촌’하고 살갑게 부르기에는 그 모습도, 소식도 가물가물했다. 그 후로 이십년이 훌쩍 지나서 다시 꼭 그를 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한 번 쯤 외국에 살아보고 싶다는 나의 어린 마음이었다. 2017년 여름, 나는 자기소개서를 포트폴리오로 제작해서 카톡으로 첫 인사와 함께 PDF를 보냈다. <How this man travels>라는 발칙한 제목으로. 그는 그런 조카를 귀엽게 봐주었고, 그 후 일주일 뒤 다짜고짜 LA 공항에서 이십 년 만에 재회하게 된다. 라고 해도, 이십 년 만에 지구 반대편에서 만나는 친척이란, ‘남’에 좀 더 가깝다. 우리는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미국 가정식을 사이에 두고 ‘그 동안 잘 지냈느냐’나, ‘어떻게 사느냐’ 가족스런 안부도 묻지 못하고, ‘주로 무슨 일을 하세요’,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 같은 처음 보는 사람의 대화를 나눴다.


미국에서 지내게 해달라며 다짜고짜 보낸 포트폴리오 표지. 사진 속 미소를 통해 뻔뻔함을 엿볼 수 있다.



미국은 비자 최대 제한이 100일인가 그랬다. 숙모와 오붓하게 두 분이서 사시던 삼촌은 갑자기 덜컥 다 큰 낯선 남자와 100일 간 셋이 살게 되었다. 자기소개서 PDF 한 통으로 100일 숙박을 쇼부 치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세상에 그렇게 무례한 세입자가 없다. 내 방 한 칸을 받고, 동네의 규칙을 간단히 소개 받았다. 저 밑 비탈길을 내려가면 슈퍼마켓, 저 쪽은 교회, 해변으로 갈 수 있는 버스 번호 몇 가지와 저 아래 절대 가면 안 된다는 위험한 흑인 동네... 신작 RPG 게임을 처음 플레이하듯 설렜지만, 그것도 처음 며칠, 100일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었다. 일주일이 두 세 번 가는 동안 호기심도 가진 돈도 다 바닥 나버리고 그 뒤론 슈퍼에서 사온 미국 과자를 먹으며 주로 가만히 방에 앉아 페이스북을 하는 게 일과의 전부였다. 쇼파에 누워 생활한지 일주일이 다 되던 날, 삼촌은 나를 내려다 보더니 같이 어딜 좀 가자고 했다.


그렇게 Pest control 일을 시작했다. 바퀴벌레나 벼룩, 쥐 같은 해충들을 잡는 출장 방제 서비스 같은 일이었다. 삼촌과 나는 패트와 매트처럼 커다란 트럭에 방제 도구를 잔뜩 싣고서 이 집 저 집 바퀴벌레를 잡았다. 어느 날은 아파트 한 채 120가구를 통째로, 또 어떤 날은 차이나타운 한 바퀴를 돌았다. 한 여름 내내 약을 치고 호스를 감다 보면, 군 복무 시절 바짝 훈련 받던 때처럼 땀 범벅이 되곤 했다. 한창 할로윈 축제 시즌이었는데, 방문하는 집마다 그 국적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할로윈을 꾸며놓았던 게 생각이 난다. 낮에는 그렇게 열심히 벌레를 잡고 저녁에는 그 트럭을 타고 근교 여행을 갔다. 트럼프의 별장, 말리부 가는 길목 작은 성당, 예쁜 공동묘지, 구글에 아무리 물어봐도 나오지 않던 숨은 여행지들을 주로 데리고 가주셨다. 막 신기해서 여기저기 들어가보고 사진 찍고 하다가 문득 뒤돌아봤을 때, 그는 대부분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언제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때마다 엄마의 오빠는 나의 삼촌이 되어있었다.


Pest control, 벌레 잡는 일을 했다. 미국 사람들 집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는 사람을 참 좋아했다. 신학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박사였고, 지역을 두루 다니며 여러 교인 커뮤니티에서 장들을 맡았다. 같이 있으면 하루에도 정말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할 수 있었다. ‘마이 네퓨’ 그게 주로 삼촌이 하는 나의 소개였다. 그는 사람을 만날 때면 항상 그 크고 두툼한 손을 불쑥, 거의 상대의 배에 닿을 만큼 가깝게 내밀고선 부산 사투리 억양으로 “나이쓰- 투, 미츄?” 하고 씨익 치아가 다 보이도록 웃곤 했다. 처음 공항에서 그 손을 잡았을 때 우악스러울 정도로 투박하고 힘이 세서 ‘아니 삼촌이 외국사람이었나’ 착각할 정도였다. 미친 친화력은 모르는 사람을 마주할 때 더욱 빛을 발했다. 트럭 뒷좌석에 항상 생수병을 박스로 싣고 다녔는데, 도로에 홈리스가 보이면 갑자기 벌떡 내리더니 성큼성큼 그들에게 걸어가서 악수할 때처럼 그 두툼한 손으로 생수를 턱 내밀었다. 나는 삼촌이 총을 맞을까봐 너무 걱정되었는데(경험자로서, 그의 거친 악수는 충분히 오해할만큼 위협적인 것이었다) 차로 돌아오는 삼촌 뒤로 홈리스들은 대부분 활짝 웃으며 시골 사람들 마냥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중에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지내던 삼촌의 집은 노숙인 쉼터로 운영하시던 곳이었다.


구글 지도를 통해 내 방이 노숙인들을 위한 방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직업을 떠나 참 선한 사람이었다.



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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