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삼촌을 그리워하며
부산 사람은 참 이게 문제다. 이만큼 좋다, 이만큼 가깝다 표현을 못한다. 내색을 안 하는 게 순 미덕인 줄 안다. 내 이야기다. 나는 애교는 커녕, 함께 지내는 그 100일 간 서글한 농담 한 마디, 살갑게 어깨 한 번을 못 주물렀다. 외려 예의랍시고 다나까를 쓰며 이만큼 거리를 벌렸다.
삼촌은 예순 나이에 자식이 없었다. 그도 부산 사람이었기에 이렇다 할 표현을 한 적은 없었지만, 그의 투박한 챙김과 나눴던 땀방울들은 이제와 생각해보면, 어쩌면 아들이 있다면 해보고 싶은 것들이 아닐까 싶다. 지금 나에게 드는 감정이 불효와 비슷한 것처럼, 그가 나에게 보여줬던 관심은 아버지의 정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좀 더 살가울 것을. 그 낯선 땅 건너 찾아온 반가운 혈육이 무뚝뚝한 내가 아니라, 다정한 누군가였다면 더 좋았을 것을. 이제 와서 죄송함 보단 주제 넘게 애섧다.
늘 다정하기보단 투박했던 삼촌만의 표현 방식, 그래서 떠올릴 때마다 더 깊이 가슴 저리다. 그와 함께 있던 장면들이 댐 둑 무너지듯 쏟아진다.
나이대 비해 너무 살이 붙었다 구박하며 아침마다 살뜰히 고구마를 삶으시던 뒷모습을 기억한다.
그렇게 함께 아침마다 할리우드 대로를 건너 그리피스 산을 올랐던 걸 기억한다.
또래도 만나보라며 일요일마다 외곽 교회에 차로 데려다 주시던 것을 기억한다.
캘리포니아 스시집에서 밥에 침을 튀기며 지인들에게 내 조카는 천재라고 떠드시던 모습을 기억한다.
고수를 그렇게 좋아하셔서 어떤 음식에든 넣어 드시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러다 나도 고수에 중독이 되어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고수를 쌓아두고 함께 퍼먹던 것을 기억한다.
제일 좋은 자리 보여주겠다며 헐레벌떡 뛰어들어가 시티뷰 자리를 맡던 모습을 기억한다.
늘 그러고선 리액션을 내심 기대하며 가만히 숨죽이시던, 어딘가 귀여우시던 모습을 기억한다.
말리부 해변에서, 조카가 술을 좋아한다고 목사면서도 맥주를 나눠 마시던 모습을 기억한다.
홈리스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던 그 선한 모습을, 생수병을 기억한다.
새벽에 벌컥 방에 들어와 잠든 나의 발에 손을 얹고 주님... 하며 한참을 기도하시던 것을 기억한다.
누군가 미국 생활을 물어올 때면 내내 절뚝거리던 기억을 가장 앞세우고선, 그 시간들을 허름한 것으로 만들어 온 나였다. 삼촌네서 지냈다는 것이 어딘가 멋지지 않다는 생각에 은근슬쩍 빼놓고 말하기도 했었다. 돌이켜보니 근사한 기억들은 그 집 안에 있었는데. 삼촌이 만들어준 정성 가득한 추억들이 있었는데. 다신 볼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나서야 겨우 그 때가 그립다. 후회는 항상 한 발짝 늦는다는 걸 알지만, 그 100일이 삼촌과의 마지막 남은 날이란 걸 알았다면 마지막 날 공항에서 포옹이라도 했을텐데. 살가운 말 한 마디라도 용기 내서 해봤을텐데. 하다 못해 감사한 마음 카톡으로라도 편지에 장문으로 담았을 텐데. 마지막 날, 사랑한다는 말 대신 꺼낸 ‘또 봬요’는 지킬 수 없는 끝인사가 되었다.
삼촌은 언젠가 공동묘지에 데려간 적이 있다. 거기엔 그가 아는 사람이 묻혀있진 않았지만 그는 그렇게 공원 가듯 그곳에 가는 걸 좋아했다. 노을이 길게 내려앉은 무덤가는 묘한 보랏빛 아름다움이 있었다. 신기한 것은 무덤 마다마다 그들의 가족들과 친구들이 돗자리를 깔고 피크닉처럼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문화 충격으로 멍하니 바라보던 나에게 그는 그렇게 말했다. “무슨 날이어서 오나, 그저 가족이 보고 싶어서 오는 거지. 여기서 공동묘지는 무서운 곳이 아니야. 같이 먹고 마시고 즐거운 곳이지.” 삶과 죽음이 한가지로 느껴져서 공동묘지를 좋아한다던 삼촌. 지금 좋아하는 그 곳에 잠드셨을까? 나도 그 곁에 앉아 삼촌이 좋아하시던 고수풀과 카레를 잔뜩 싸서 먹고 마시고 찬송을 언제고 즐거이 불러드릴텐데.
나는 비록 상중에 울지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오래 할아버지를 여읜 상실감과 할아버지에 대한 자잘한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사진을 남기지 않은 할아버지 신관의 섬세한 부분까지. 그리고 다들 잊어버린 사소한 버릇이나 일화까지를 어른 되고 시집 간 후에도 기억하고 있어서 기억력 좋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나는 그게 기억력의 문제가 아니라 애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울기 위해 쓴 회상은 여기까지다. 여전히 눈물은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여기서 더 억지로 짜낼 만한 말들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사실은 아직도 미국에 외삼촌이 생수를 들고 성큼성큼 걸어다니실 것 같다. 지구 반대편이란 그만큼이나 머니까. 삶과 죽음이란 경계가 딱 그만큼 정도로만 멀게 느껴진다. 실감이 안 난단 소리다.
다만 가슴 한 쪽이 뻐근하다. 그와의 기억들을 쏟아낸 직후부터. 내가 삼촌이 보고싶나 보다. 한의원에서처럼, 가만히 저편 어딘가에 앉아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을 것 같다. 어느 밤 중에 눈을 떠보면 그 때 그랬듯 내 발에 손을 올리고 언제고 내 기도를 하고 계실 것 같다. 무뚝뚝한 조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애정표현이란 오래도록 그 추억들을 기억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그래서 글로 쓴다. 내가 이만큼 많이 기억하고 있다고, 삼촌을 많이 사랑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