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8월 18일 선생님이

어느 여름방학에 받은 편지

by 김보

선생님 잘 지내시지요? 저는 잘 지냈구요, 저희 어머니도 잘 계십니다. 기억 나세요? 선생님과 친하셨잖아요 저희 어머니. 오늘 어머니께서 오래된 상자에서 이 편지를 찾아 보내주셨어요. 카톡으로요. 그러고 보면 세상이 정말 많이 변하였습니다. 그 시절에 카톡을 상상이나 했을까요? 그러나 이 편지가 카톡으로 보내진 것이었다면 오늘 선생님을 떠올리지 못할 뻔 했습니다. 카톡은 오래 되면 삭제되니까요. 아날로그는 오래 지나도 어딘가 남아 언젠가 툭 발견되기에 감성인가 봅니다.


선생님 저는 어느덧 갓 서른이 되었습니다. 갓 두자리 수 나이를 달고 코를 대롱 달고서 '선생님,안녕,하세요,친구들아,너희도,안녕!' 박거리는 귀여운 보성이를 떠올리시겠지만, 정작 저는 '방학에 편지를 다 쓰시고, 휴일 초과근무 빡세네'하며 염세를 주렁 달은 징그런 아저씨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도 마찬가지로, 선생님은 스물 일곱 그 모습 그대로 하나도 안 늙으시고 어렴풋이 남아 있습니다.


초임으 담임을 맡으셨던 선생님은 참 유난히 열정적이셨습니다. 저도 신입사원을 지나와보니 그 동력이 공감이 갑니다. 저에게도 스물 일곱은 내내 패기가 넘쳤지요. 선생님, 이렇게 아이들 집으로 심히 편지 셨던 기억이 납니다. 반 아이들 한 명 한 명 얼굴을 그려 그림 선물을 해주시고, 쥐어짜낸 성의 없는 일기장에도 항상 정성 어린 답글을 적어주셨던 기억도요. 어머니와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주셨지요. 아, 다시 생각해보니 제가 틀렸습니다. 그걸 겨우 신입의 패기로 퉁 칠 순 없는 것이었습니다. 더 깊었습니다. 원동력이 달랐습니다.


어린 제가 이만큼 커서, 머릿 속 선생님의 모습보다 몇 년 더 늙어서, 편지에서 그 원동력을 발견하고 이제서야 가슴이 저릿합니다. 선생님, 제가 사랑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선생님의 귀한 마음을 거저 받았습니다. 편지에 자국이 선명할 만큼 꾹꾹 눌러 쓴 글들은 추가근무의 성실함이 아니라, 그만 제자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기고 싶은 사랑이었다는 걸요. 심이라는 사랑. 징글징글하게 늙어버린, 사랑을 잊어버린 요즘의 저는 이렇게 어깨 너머로 사랑에 대해 겨우 가늠합니다. 조금이나마 타인을 사랑하는 법을 배웁니다. 아직도 선생님이 게 커다란 것들을 가르치십니다.


선생님, 보고 싶습니다. 전에는 <TV는 사랑을 싣고> 같은 프로그램도 많이 하던데, 전화번호부와 졸업앨범 비상연락망으로도 사람을 찾곤 했던데, 이제는 어디서 선생님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20년 전 상상했던 좋은 세상, 카톡이 아닌 오히려 이런 것들이었을 텐데요. 쨌든 오랜만에 마주친 아날로그 덕에 어렴풋한 선생님을 그립니다. 편지를 주신 덕분에, 사랑을 주신 덕분에 이렇게 자랐습니다. 보세요. 쓸 글이 없어 들여쓰기와 띄어쓰기로 일기장을 가득 채우던 보성이는 다섯 문단 빼곡히 글을 쓰는 어엿한 어른이 되었습니다. 제가 선생님 만큼 커서 답장을 합니다.


만나게 될 그 날에 이 답장을 드리고 싶습니다. 선생님처럼 말을 맺며 이만 줄입니다. 선생님, 건강한 모습으로 언젠가 만나요.


2021년 1월 19일 보성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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