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었다는 말은 이별 며칠차부터

부치지 못한 연애 편지 마지막통

by 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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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자는 말은 만만해졌다. 절대 입에 올리지 말자던 금기 같은 말이 마지막 결심으로 - 절박함의 증거로 - 투정의 표현으로 점차 가볍게 전락했다. 세상 모든 것 한 번이 어렵다지만 이것만큼은 한 번만 어려웠어야 했다. 여러 번 반복된 이별 후에 돌아보니 헤퍼진 것은 말이 아니라 너에 대한 내 태도였고 그 때마다 관계는 낡아갔다. 우리는 내 여러 번의 '헤어지자'와 너의 단 한 번의 '헤어지자'를 합쳐 그 복잡한 서사를 마감했다.


늘 있었던 너는 하루 아침에 없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니가 없던 내 예전 모습으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만난 내 모습이 반가웠다가 허전했다가를 몇 번 교차하며 제 모양을 찾아가고 있다. 너 만나기 전에 나는 외로운 글을 많이 썼구나, 펍에서 혼술하는 걸 좋아했구나, 익숙한 것들을 되찾기도 하고, 강동엔 정말 갈 일이 없었구나, 떡볶이를 안 좋아했구나, 어색한 것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몇 번의 연애 경험에서 억지로 털어내려 하면 상처가 덧난다는 것을 배웠다. 니 생각이 날 때면 나도록 내버려두었더니 일상이 금세 회복이 된다. 니가 비운 자리는 취미가 차곡차곡 채워졌고 혼자 있을 때 찾아오는 우울도 멎었다. 생각보다 빨리 평온해진 내 모습에 외려 내가 서운했다.


우리 헤어지고 50일이 지났다. 어느덧 나는 잘 지내고 충분히 괜찮다. 주변에서 걱정스러운 말을 건넬 때에도 나는 이미 다 잊었다고 쿨하게 말한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잊혀진 건 아무 것도 없다. 나는 아직도 니 생각을 한다. 생각의 형태는 수동태다. 특별한 때를 떠올리기 보다 일상 곳곳에서 저절로 떠오른다. 오해할까봐 말하자면 미련 같은게 아니다. 너 이전 연애의 기억들도 가끔 그렇게 저절로 떠오르곤 했다. 애정의 크기나 미련 같은 감정과는 별개다. 생각해 보면, 나는 하루가 멀다하고 널 보러 갔다. 보고 싶은 것도 당연하다. 작은 일상의 순간에도 니 생각을 했다. 생각이 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니까 이 기억은 일종의 습관 같은 거다. 오래 눌러서 표시가 남은 어떤 자국처럼.


잊었다는 말은 시간이 얼마나 지나야 진짜가 될 수 있을까? 이름과 얼굴까지 가물가물해지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언제쯤 널 기억하는 습관이 고쳐질까. 시간이 약이라는 말만큼 무책임한 말도 없다. 처방만 했지 언제 낫는단 말이 없으니까. 무턱대고 시간만 믿을 수도 없다. 어떤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더 또렷해진다. 너네 동네 골목 냄새나 너가 자주 흥얼거리던 노래 가사 같은 것. 눈을 감으면 폴라로이드 같은 추억들이 천천히 구체화된다. 이제 보니 너와의 기억 대부분이 그렇다. 나는 궁금하다. 세상 사람들은 특별한 것들을 어떻게 잊어내는지. 대체 얼마나 걸리는건지. 그리고 너는 지금 어떤지.


니가 많이 떠오른다. 미운 건 멋대로 떠오른 니가 아니라 떠오른 장면마다 나쁘게 굴고 있는 내 모습이다. 모질게 굴지 말 걸, 더 잘해줄 걸. 임재현의 <사랑에 연습이 있었다면>이 예전하고 다르게 들린다. '나는 더 잘 할 수 있고 다시...' 이게 그리움인지 후회인지 분간이 안 된다. 뭐가 되었든 앵콜은 없다. 끝나버린 노래는 다시 부를 수 없고 더 이상 같은 노래도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저 떠오른 기억마다 못된 내가, 상처 받는 니가 아쉬울 뿐이다. 어쩌면 나는 습관처럼 너를 떠올리는 방법으로 못되게 굴었던 나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걸지도 모른다. 내가 잘못했다고, 반성하고 있다고. 그렇게 다들 헤어지고서 잘 못해준 쪽이 더 오래 잊지 못하는가 보다.


어떤 심리학 저널에서 헤어진 사람을 잊는데에 11주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세어보니 한 4주가 남았다. 4주 뒤면 이 많은 너와 쌓은 기억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질 수 있을까? 그건 그것대로 나름 서운하겠다. 있잖아. 나는 너를 못 잊고 그리워하고 있다. 매일 니 생각이 난다. 그래도 눈을 질끈 감아 잊어내려 애쓰지 않을 거다. 다른 사람으로 덮지도 않을 거다. 지금처럼 떠오르는 대로 내버려 둘 거다. 아직은 너랑 함께 했던 시간에 살고 싶다. 좋은 기억은 좋은 대로, 아쉬운 기억은 아쉬운 대로. 우리가 좋아하던 노래 제목처럼, 잘 지내자, 우리.



짙은 - 잘 지내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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