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죽음

반 고흐의 편지(4), 10월 5일 단상

by 김요섭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늘 나를 꿈꾸게 한다. 그럴 때 묻곤 하지. 왜 프랑스 지도 위에 표시된 검은 점에 가듯 창공에 반짝이는 저 별에게 갈 수 없는 것일까?' - 반 고흐



그녀의 온도


늦은 밤, 그녀는 고성(古城)의 창가로 나왔다. 초가을임에도 바람이 차갑다. 보름달은 검붉은 여자의 몸을 더듬듯 비춘다. 유난히 밝은 빛에 그녀의 몸이 움츠러든다. 자신의 요란한 심장박동 소리가 들릴 듯 이상하리만큼 고요한 밤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익숙한 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항상 올려다보기만 했던 곳에서 자신이 사는 곳을 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는 마치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난간을 짚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하룻밤 사이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다. 새벽이 되면 모든 것이 드러날 것이다. 불에 타서 죽거나, 사지가 찢기는 고문을 당하다 죽어갈 것을 생각하니 몸서리쳐진다.


그의 피는 천천히 식어가고 있다. 여자는 장작불이 이글거리는 벽난로 앞에 섰다. 문득 자신이 이렇게 침착할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바닥에 느리게 흐르고 있는 것이 발밑으로 다가온다. 타오르는 열기를 다시 한번, 소유하기 위한 의지는 마른 장작이 고통스럽게 소리 지르는 곳으로 이끈다. 그녀는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의자에 앉았다.


텅 빈 눈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다. 그녀와 다른 온도의 피는 자신의 뱃속에서 미끌거린다. 레이스가 찢겨 덜렁거리는 드레스는 온통 그의 피 냄새로 진동한다. 여자는 잊었던 통증을 느끼고 손으로 느리게 자신의 몸을 어루만진다. 문득 자신에게 흰 드레스를 입힐 때 시녀의 표정이 떠오른다. 코르셋을 조일 때의 하녀의 손은 구겨진 천을 펼치듯 무감했다. 영주의 거친 손길도 다르지 않았다. 단지 사냥한 사슴을 칼로 가를 때처럼 날 것을 소유하는 것의 흥분이 더해졌을 뿐이다.


그렇게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는 이제 한쪽 팔을 침대 아래로 떨군 채 널브러져 있다. 여자는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자신의 공포는 지옥불처럼 넘실대는 저곳에서 피보다 먼저 타버린 것 같다. 심연의 찌꺼기는 찾아볼 수 없이 완전연소되었고, 쓸쓸한 가을 하늘처럼 공허함만 남았다. 황금색 침실 위로 불빛에 이글거리는 독수리 문양의 벽화가 보인다. 그녀는 영주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미끄러지듯 창가로 향한다.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는 것처럼, 별까지 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듯,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별에 갈 수 없다.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건 별까지 걸어간다는 것이지' - 반 고흐


작은 죽음


보름달은 이제 기울기 시작한다. 서늘한 밤은 바람도 없이 그녀의 육체를 식힌다. 늙은 짐승의 피는 몸에 질척하게 달라붙어 흉터처럼 굳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여자도 알고 있다. 서두르지 않는다. 마지막 밤하늘을 천천히 올려다본다. 심장의 파동이 한없이 느려진다. 6400만 광년이나 떨어진 처녀자리에서 온 빛은 비로소 그녀에게 도착했다. 보름달, 가까운 밝음으로 결코 지울 수 없는 것이 그녀를 어루만진다. 도래하는 타자는 무한의 파동으로 심연에 맞닿는다.


그녀의 두 눈이 촉촉해진다. 깊은 바다에서 끌어올려진 것은, 수면을 넘어 하늘까지 솟아오르려 한다. 이제 때가 이르렀음을, 여자의 무의식이 이끈다. 천천히 피가 묻은 드레스를 벗는다. 기울어가는 달빛이 여자의 마지막 남은 먼지를 털어낸다. 그녀는 난간에 오른다. 축복처럼 오는 빛의 손길에 더욱 가까이 다가간다. 이 순간,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두 팔로 감싸 안는다. 손이 데일 정도로 뜨겁다. 빛은 어느새 불로 변했다.


'바다는 공기가 되고 저 높은 천공이 되고 빛의 길이 되고 스스로 빛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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