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반 고흐의 편지(2), 봄날은 간다, 9월 28일 단상
수레바퀴는 스스로 돌지 않는다.
그는 구멍 뚫린 해면을 닮아간다. 푸석해진 피부는 핏기를 잃은 지 오래다. 누군가 물에 적셔서 거품을 내야 하는 목욕타월처럼 그는 따뜻한 손길이 필요하다. 아이보리색 양털 러그가 깔린 리클라이너에 그는 기대앉았다. 요양보호사가 가져온 데운 수건을 탁해진 눈에 올린다. 얼굴을 반쯤 덮은 붉은 천 아래로 온열찜질기가 아랫배와 무릎관절을 덮고 있다. 창가 쪽으로는 늦은 오후의 햇살이 길게 늘어져있다. 식은 몸을 데우는 도마뱀처럼 그는 따스한 볕을 향해 몸을 들썩인다.
그는 열감이 사라진 수건에 손을 가져간다. 어깨를 들어 올리려다, 날카로운 통증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힘없이 바닥에 널브러진 붉은 천을 그는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한숨이 나온다.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이 결코 자연스럽지 않았다는 진실을 깨닫는 순간, 너무 서늘하다. 양말을 신는 것도 벅찬 몸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것은 사치란 느낌이 든다.
채권자들이 들이닥친 것처럼 그의 신체는 곳곳에서 악을 쓴다. 여태껏 '젊음'이란 명성에 숨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뒤늦은 반란이 시작되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당당히 권리를 외친다.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억압된 욕망은 지금 당장 변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이미 다 써버렸고, 갚을 여력도 없다. 무책임한 항변에 그들은 성난 얼굴로 소리친다. '우리는 줄 때까지 언제까지고 기다리겠다. 당신이 언제 죽을지 알고 그냥 간단 말인가?' 그는 두 눈을 껌뻑거리며, 그들의 분탕질을 온몸으로 감당할 뿐이다. 황혼의 삶은 너무 무겁고, 한편 너무 가벼워졌다.
'나는 성공이 끔찍스럽다. 인상파 화가들이 성공해서 축제를 열 수도 있겠지.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 축제의 다음날이다.' -반 고흐
지나간 계절
그는 문득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책장을 올려다본다. 서재의 중간쯤, 2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된 그의 초판본이 꽂혀있는 곳에 시선이 머문다.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가 멈췄다. 그의 눈이 잠시 초점을 잃는다. 해바라기처럼 꼿꼿이 솟아올라 태양을 독차지하던 계절은 속절없이 흘러버렸다. 해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도 빛을 잃지 않던 샛노란 얼굴은 이제 바래졌다. 뿌옇게 변한 두 눈은 더 이상 읽을 수 없다. 그의 봄날은 갈색 격자의 감옥에 단단히 갇혔다. 도약할 수 있다는 어떤 희망도 없이 그저 기다릴 뿐이다.
'그러나 인생은 너무 짧고, 특히 모든 것에 용감히 맞설 수 있을 만큼 강한 힘을 유지할 수 있는 건 몇 년 되지 않는다.' -반 고흐
점점 육체 안에 유폐되어가는 느낌이 든다. 더 이상 바깥은 없다. 서늘하다 못해 차가운 책상은 손도 대기 싫다. 시린 무릎과 삐걱거리는 관절의 통증만이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비참하다. 모든 걸 부정하고 싶어 진다. 아니, 정말 모르겠다. 난 잘못한 게 없는데, 이런 고통을 감내해야 하나? 아니다. 정말 미안하다. 내가 다 잘못했다. '난 잠시 훔쳐본 것을 지나치게 과장해낸 허풍쟁이다. 어쭙잖은 명성을 얻은 위선자며, 널 기만한 대가로 피 묻은 돈을 벌었다.'
미로 속을 헤맨다. 나는 계속 분리되고 있다. 그녀가 건네 준 따스한 털 뭉치는 이미 미로 속을 헤매다 잃었다. 바닥 곳곳에서 발견되는 털실은 더 이상 외부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그녀는 나보다 더 늙었거나 이미 죽어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이제, 바깥은 여전히 내부일 뿐이다. 해바라기를 바라보던 하늘은 산산이 흩어졌다. 비루한 육체로부터 시작된 이별은 준비도 없이 계속된다.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압류 통지서는 빨간색으로 도배될 것이다. 나는 이미 선고받았다.
'요람에 누워 있는 아이를 바라보면, 눈 속에 무한이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게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잘 모르겠다'는 이 느낌이 현재의 우리 삶을 단순한 철도여행에 비유할 수 있게 해 준다. 기차를 타고 빨리 전진할 때면, 아주 가까이서 지나치는 대상도 분간할 수 없고 무엇보다 기관차 자체를 볼 수 없다' -반 고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