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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가계부 : 인생 노잼

D : 놀고 싶은 3년차 직장인 (금융권 대기업), 여, 26세

by 모초록 Apr 04. 2025

오로나민 씨 3개 (2+1)

2,000 


세부 왕복 항공권 2인

 990,000 



원래도 짧은 2월이 올해는 더 짧게 느껴졌다. 회사는 회사대로 바빴고 나름대로 인생의 권태기를 겪었기 때문이다. 아침 7시에 갑자기 출근 준비를 하다가 ‘너무 재미없다 너무 재미없는데 어떡하지?’ 같은 카카오톡을 보내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그랬다.


그럴 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가지각색의 답변을 해주었는데

A : 원래 다 그렇게 사는 거다.

B : 뭔 인생이 망하긴 망하냐, 그냥 퇴사하고 프랑스나 가라.

C : 그럴 때 인생 고뇌 한 번 하는 거다. 그냥 받아들여라.

D : 운동을 해라.

E : 덕질을 해라. 난 정우(NCT)한테 셀카 하나만 와도 즐겁다.


같은 것들이었다. 누구한테 질문하고 답을 듣는다고 나아지는 것도 아닌 걸 잘 알면서 계속 재미없다고 중얼댔다. 그냥 이렇게 지나 보내는 것밖에 답이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무료함에 빠져서 인터넷에서 해본 에고 그램 테스트 결과에는 ‘오로지 헌신인 타입’이라는 말과 함께 ‘타인을 위해 애를 쓰거나 비위를 맞추거나 칭찬을 듣는 일에 삶의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라며 ‘자기 필생의 사업이라는 것도 갖고 있지 않은’, ‘이대로는 영원히 재미없는 인생이 되어버리기 쉽습니다.’ 같은 말들이 쓰여 있었다. 그걸 보니 또 괜히 심통이 나서 아니 이 정도면 재밌는 인생이지 뭘 더 바라냐며(속으로) 중얼대기도 했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삶이 재미없다고 느껴질 때면 누군가가 나한테 잘해줬던 일을 자주 곱씹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도 잘하려고 노력했다. 타인을 위해 애쓰면서, 타인이 나를 위해 애쓰는 행동이나 말을 보면서 삶의 보람을 느꼈다는 뜻이다. 그럴 때면 무료함이 조금은 상쇄되었고 내가 기민한 사람인지 단순한 사람인지 헷갈렸다. 어쨌든 이쯤이면 ‘운이 좋은 타입’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건 제주도에서 만난 언니한테 배운 습관이다. 처음에는 운이 좋다는 말을 입 밖으로 자주 하는 사람이 신기했는데, 나중엔 나도 의식적으로 자주 쓰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면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 될 거 같고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로나민 씨 3개 2,000원

기력이나 기분이 딸린다고 느껴질 때는 편의점에서 오로나민 씨를 사 먹었다. 2+1이라 어떨 때는 둘이 가서 하나를 남기고 어떨 때는 혼자 가서 나 혼자 세 개를 쌓아두고27 가끔 야근하는 날에는 누가 세 개를 사줬다. 먹으면 조금 힘이 났다.28


3박 5일 세부 여행

명절 연휴에 가는 해외여행은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비행기가 비싸지 않았고, 겨울이 너무 추워서 따뜻한 나라에 다녀오고 싶었다. 동생이랑 가는 여행이라 항공권은 내가 내주기로 했다. 아빠가 “큰 딸 동생과 함께 즐거운 여행을”라는 글귀가 써진 봉투에 용돈을 줬다. 


출발하는 날 업무 보고 메일을 쓰다가 비행기를 놓칠 뻔했다. 무려 2주를 꼬박 공들인 메일이었지만, 전부 보내지도 못했다. 다시는 출근하는 날 밤 비행기를 잡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동생이랑 인천공항을 뛰어다녔다.


세부는 자연과 상업이 적절하게 섞여 있는 여행지 같았는데 그게 나름의 매력이자 또 아쉬운 요소이기도 했다. 세부에 오는 사람은 다 본다는 고래상어 투어는 생각보다 양식장 또는 수족관 같았다. 현지 가이드가 자꾸 새우젓을 뿌리고는 고래상어가 가까이 오면 브이를 하라고 했다. 폭포를 보려고 처음 보는 사람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아 비 오는 언덕을 내려가는 일은 즐거웠다. 세계 3대 캐니어닝(canyoning)이라는 오슬롭 캐니어닝에서는 10m 다이빙도 하고 협곡 사이 사이를 물을 타고 떠내려 다녔다. 매 순간순간을 가이드님이 사진으로 남겨주셨다. 바위 꼭대기에서 파는 꼬치에 제로 콜라를 마셨다.


극한의 투어 일정을 마치고 나서는 다른 투어 일정은 모두 취소하고 리조트에서 쉬었다. 리조트는 매일 아침 호텔 방 문 앞에 코코넛을 놓아 주고, 그날의 프로그램을 종이에 써서 꽂아두는 로맨틱한 곳이었다. 수영을 하고 책을 읽고 또 수영을 하고 칵테일을 마시다 다시 마지막 마사지를 받고 픽업 서비스를 해주겠다는 직원의권유를 무시하고는 동생이랑 짐 한 쪽씩을 들고 세부 밤거리를 걸었는데 그 순간이 뭔가 제일 웃기고 재밌었다. 수영을 하고 망고를 배불리 먹었다. 망고스틴은 벌레가 너무 많아서 못 먹었다.


다시 돌아왔을 땐 서울의 추위는 한풀 꺾여 있었고 쓰다 만 보고서를 다시 썼다. 그러다 지겨울 때면 세부에서 찍은 사진들을 다시 돌아봤다. 언젠가 싶게 옛날 같다가도 또 어제처럼 생생했다.

3박 5일 세부 여행 지출3박 5일 세부 여행 지출


시가롤과 항정살 구이 24,000원, 12,000원

캄보디아 봉사활동에 함께 갔던 친구들이랑 이태원에서 만났다. 시가를 닮은 양고기 롤이랑 뚜껑을 열면 연기가 부스스 흩어지는 항정살을 먹었다. 중국에서 온 머리핀, 일본에서 온 킷캣, 과자들을 선물로 받았다. 바다 건너부터 캐리어 한자리를 차지하고 오는 선물들은 더 귀하고 소중하다.


월, 화, 목,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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