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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가계부 : 퇴사자의 주제를 모름

E : 의도치 않게 N잡러가 된 대학원생, 남, 30세

by 모초록 Mar 31. 2025

6번의 집들이 식자재비

 394,390 


복싱짐 6개월 등록비

 850,000 



수입 500,000원

지출 3,358,260원


작년 11월 퇴사 후 분주한 연말을 보내고 맞이한 1월은 즐겁기 보다는 자주 불안했다. 퇴사하면 할 일을 여러 가지 생각해 두었고, 나름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지만 그와 상관없이 종종 불안하다. 당연했던 월급이 사라진다는 것의 의미가 정말 컸다. 회사에 다닐 때는 월급날이 잘 안 오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매월 20일 나는 가지고 싶은 걸 조금씩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1월 수입의 전부는 국민 취업지원제도로 받은 50만 원인데, ‘와 나는 앞으로 1달에 50만 원만 버는 사람으로 꽤 오랜 기간을 살 수도 있겠다’ 싶다. 자기 전 문득 그런 생각이 들면 새벽에도 후암동 소월길을 몇 시간이고 걸었다. 


2024년에는 지난 3년간 회사에서 번 돈을 쓰게 되더라도 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데 쓰고 싶다. 건축은 너무 크고 완성 주기도 기니까 작은 것부터(인테리어와 가구) 시작하고 싶다. 그러나 겨우 건축회사 3년 다닌 사람에게는 아무런 일도 없을 수도 있겠지? 그래서 친환경 대학원에도 다니기로 했다. 건축 일을 오래 할 거라면 기술적인 지식도 필요할 것이다. 추가로 내가 대학원에 간다는 것을 아는 친구가 제안한 창업지원사업을 위한 작업도 시작했다. 앞으로 현실적인 계획은 잘 모르겠다. 대학원 이후에 진로를 바꾸게 될 수도, 어쩌면 조금 방황한 후에 다시 돌아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식비 855,760원 

2024년의 직업적 성취 이외에 개인적인 목표는 (1) 좋아하는 것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고자 했던 거고, (2) 다른 하나는 좋아하는 사람들을 초대해서 요리를 해주는 거였다. 1월은 정말 바쁘기도 했지만 그래도 6번의 초대가 있었다.(11월에 4번, 12월에 7번이 있었다) 우선 어려웠던 것은 메뉴 선정이었다. 내가 자신 있고 잘하는 걸 해줘야 하나? 아니면 저번 손님과는 다른 걸 해줘야하나? 하는 고민이 있었다. 1월 중 순수하게 6번의 초대를 위해서 한 장보기만을 집계해 보니 정확히 394,390원이었다. 1월 동안 집에 왔던 사람은 총 20명, 각각의 초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메뉴를 바꿔주려고 했다.30 계속 요리를 바꾸려면 효율적인 장보기가 불가능했기에 왜 백종원 아저씨가 메뉴를 줄이라고 하는지 이해가 됐다. 또 밖에서 먹을 땐 몰랐는데, 초대를 하려면 요리가 준비되는 동안 제공할 커피와 과일, 요리를 먹을 동안의 술과 음료, 그리고 식후에 이야기를 나누면서 줄 간단한 디저트라도 준비해야 했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큰 노력과 정성이 필요한 일이었는데

그 과정이 너무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오기 2시간 전부터 마음이 조금씩 분주해지고, 그들이 진지한 얘기를 하는 동안 나는 주방과 거실을 오가면서 약간 관객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듣다가 또 불쑥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점도 좋았다. 또 밖에서 만났을 때와 다른 것은 과일을 까먹으면서 할 수 있는 얘기와 나름의 코스 요리를 내주면서 할 수 있는 얘기와 또 집이라는 공간에서 약간의 술을 곁들이면서 할 수 있는 얘기가 다르다는 것. 직접 한 요리를 내주면서는 조금 더 깊은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것도 좋았다. 단순한 근황 이야기가 아니라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6번의 식사 비용으로 40만 원을 지출했다고 하면 퇴사자에게 조금 과한 것일 수도 있지만, 다음이 있다면 더 좋은 것을 해주고 싶다.


2일 | 복싱장 6개월 등록비 850,000원

큰 결심을 하고 복싱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이번 겨울은 너무 추웠고, 복싱장은 헬스장 가는 길의 중간에 있었다. 헬스장까지 가는 길이 너무 멀어서 복싱으로 방향을 바꿨다. 복싱도 다른 운동처럼 등록 개월 수에 따라 금액이 달라진다. 6개월을 등록했다. 월에 14만 원 정도 하는 비용이 적진 않지만, 무엇보다 가끔 누군가한테 맞으면 그래도 정신이 번쩍 들지 않을까?


4일 | 청년취업지원제도 500,000원

실업급여를 받지 않는 청년들의 구직활동을 지원해 주기 위해서 6개월간 월 50만 원을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인테리어 회사에 가볼지, 대학원에 가볼지 모르고 당장 돈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지금 시기에 할 수 있는 프로그램에는 열심히 참여해 보기로 했다. 이것마저 없었으면 나는 ‘퇴사 후 1월에 한푼도 벌지 못한 사람!’에 등극하는 건데, 다행히 나라가 나를 살렸다.


4일 | 기기도요(도자기 공방) 월 180,000원

컵을 만들어 보려던 것이 어느새 1년이 넘었고 아직도 지지부진 하지만, 1–2주 주기로 선생님을 뵙고 대화하는 일은 너무 좋다. 내 작업을 하고 있으면, 선생님께서 작업 중이신 그릇을 가지고 내려오셔서 이런저런 이유로 이런 시도를 했는데, 이렇게 더 해볼 예정이라고 말씀해 주신다. 정확히 2주 뒤에 공방 문을 열고 인사를 드릴 때면, 말씀해 주셨던 그릇들이 책상 위에 혹은 선반에 놓여 있다. 누군가의 끊임없는 개발 과정을 보는 것이 내 삶의 형식을 바꾸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31일 | Massimo Piombo 프렌치 워크 재킷 425,000원

퇴사 후 내 인생에서 중요한 1월을 시작하면서 올해의 마음가짐을 반영할 만한 옷을 꼭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아하고 멋진 디자인 일만 할 수는 없음을 받아들이고, 열심히 일하자는 초심자의 마음으로 입을 워크 웨어를 사고 싶었다. 특히 프렌치 워크 재킷은 대학생일 때부터 입고 싶었지만 아직까지 나에게 딱 맞는 걸 발견하지 못한 옷이었는데, 마침 이태원의 세컨핸드샵에서 정말 괜찮아보이는 프렌치 워크 재킷이 올라왔다. 프렌치 워크 재킷으로 지불한 금액은 425,000원. Massimo Piombo 라는 처음 들어보는 이탈리아 브랜드이다. 그러니까 사실은 프렌치 워크 재킷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근본 없겠지만 나는 그런 건 상관없다. 바랐던 것보다 조금 더 채도가 강한 블루인 점은 아쉽지만, 사이즈와 착용감이 너무 잘 맞는 것과 한 벌로 된 옷이라는 점이

너무 좋다. 약간 빳빳한 면으로 된 재킷을 입고 노동자의 마음으로 올해를 살면 좋을 것 같다.

퇴사자의 마음으로 2만 5천 원을 흥정해볼까 싶었지만, 내가 존경한 사람한테 배운 건 쉽게 흥정하지 않는 거였다. 그건 내가 생을 마감할 시점에는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 옷과 이걸 들여온 사람의 취향과 이 옷을 입은 2024년의 내게 올 행운에 대한 가격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재작년에 내게 촌스럽게 입고 다니지 말라고 했지만 어쩐지 나는 엄마에게 계속 촌스러운 아들로 남는 것 같아 미안하다.(엄마 미안. 하지만 올해 진짜 열심히 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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