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 (건축설계) 퇴직한 건축연구자 • 유학준비생, 남, 31세
C의 1월 특별지출 (데이트비용 별도)
밴드 합주실 3시간 대관료
4년 차 대리가 되었다. 불경기에 월급은 20만 원 정도 올랐다. 올해로 3년을 채워야 했던 전문연구요원 대체복무 기간이 끝나고, 2월 말이 되면 비로소 이직 혹은 퇴직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시점이 된다. 오래전부터 자유가 함께 할 이 순간을 기다려왔기에, 설렘과 두려움이 나를 맞이했다.
기다려왔지만 준비는 하지 못했다. 어렴풋하게나마 상상만 해오던 해외 박사 준비를 이제는 정말로 준비해 볼 수 있는 타이밍이 되었다. 미리 계획했더라면 틈틈이 논문을 쓰며 학술 활동을 지속했겠지만, 월급 생활에 금세 익숙해져 직장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려온 것 같다.13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자취방에서 살고, 스스로를 가꾸고, 좋은 경험에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저축해서 막연한 미래를 대비하는 것들 말이다. 하지만 소집해제의 시점이 다가오니 생각이 달라진다. 신분이 자유로워지는 것은 분명하지만 모든 생활이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님을 예감하고 있다. 특히 돈, 내 생활 기준에 부족하지 않게 급여를 받아오던 나는 퇴직을 하면 돈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을 하곤 했다.
막연한 미래를 위한 대비는 작년 11월부터 시작되어 가계부를 적는 습관으로 이어졌다. 생활비와 공과금, 정기 지출, 특별한 날에 쓰는 돈인 특별지출을 구분하여 소비 행태를 들여다보면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매일의 소비를 엑셀로 정리해 왔다. 습관은 생겼지만 가계부를 다시 들춰보는 일은 하지 않았다. 마치 자기검열을 미루는 것처럼, 내가 얼마나 쓰고 얼마나 더 아낄 수 있는지 따져보는 것은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월급도 올랐고, 직장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조금 더 누리고 싶은, 조금은 안일한 마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차에 글쓰기 모임을 하던 친구들이 소비를 주제로 한 달에 두 번씩 글을 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하고 있던 것은 각자의 소비 경험을 일 년 동안 나누고, 그것을 집대성해서 무언가의 결과물을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월별로 자신만의 소비 결산을 해서 나눈 것을 쌓아보자는 계획이었는데, 나로서도 흥미로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되돌아보지 않던 나의 가계부를 반강제적으로 들춰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의미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본래 글짓기에 관심이 있었기에 얼른 관심을 표하고 나도 끼워 달라고 했다.
특별한 기준 없이 만들어두었던 분류 체계를 즉흥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편의점이나 카페 등은 간식비, 생필품, 교통비 등은 생활비, 데이트 때 사용하는 비용은 데이트비… 엄격하게 분리하는 것은 아니라서 데이트할 때의 간식비가 식비 카테고리로 분류되기도 한다. 어디까지나 나의 소비 행태를 어림하기 위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특별 지출이 가장 애매한 항목인데, 특별한 날의 특별한 소비가 여기에 해당한다. 논문 제출을 위한 학회비나 심사비, 처음 새집으로 독립한 주민 씨를 위한 집들이 선물 등이 포함된다. 이 중 몇 가지 지출 항목을
소개해 본다.
① 특별지출*— 학회비, 논문투고비 170,000원
소집해제 후 연구자로서의 커리어를 이어가기 위해 논문을 작성해 보기로 했다. 해외 박사과정 지원을 위해서라도 연구 커리어가 필요하기 때문에 논문을 투고하였다. 학회 회비는 매년 80,000원이고, 투고 비용은 심사비를 포함해서 90,000원이었다. 대한건축학회의 연회비는 매년 내는 게 싫다면 종신 회비를 낼 수도 있다. 120만 원, 15년 치를 미리 지불한다면 평생 대한건축학회의 회원이 된다. 연구자로 평생 살아가겠다면 큰돈을 미리 낼 수 있다는 것인데, 아직은 각오가 덜 된 것 같다. 그만한 돈을 내기도 벅차다.
② 특별지출 — 연구실 모임 카페 65,000원
연구실 현역들, 갓 졸업한 졸업생들, 교수님까지 전부 모이는 자리에 나도 끼었다. 졸업 이후에도 계속해서 인연을 유지하고 있는 모임인데, 퇴직 후에 이곳으로 돌아갈 수도 있기 때문에 교수님께 인사하고 그랬던 자리이다. 올해 2월에 해외 박사 지원을 한번 해보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커피를 샀다. 이럴 때 직장인의 월급으로
대학원생들에게 보탬이 되는 게 좋다.
③ 특별지출 — 집들이 선물 171,839원
처음 독립하는 주민 씨를 위한 집들이 선물에 공을 들였다. 음악을 즐기는 그녀이기에 CD플레이어를 선물하기로 했고, 그녀의 동의를 구하고 괜찮은 중고 제품을 찾아보았다. 저렴하지만 음질이 괜찮고 디자인도 나쁘지 않은 단종된 CD플레이어 기종의 매물을 찾다가, 당근마켓이나 중고나라에서는 더 이상 매물을 찾기 어려워 일본 아마존에서 물건을 구했다. 소니 X3CD는 해외 배송으로 뽁뽁이에 돌돌 말려서 우리 집까지 왔다. 표준 전압이 110v여서 쿠팡으로 강압기도 구매해야 했다. 같이 들을 시디도 찾아 함께 선물했다. 지금은 구하기 힘든 Carla Bely의 〈Duets〉 앨범이 괜찮은 가격에 아마존에 올라와 있었다. 내가 듣던 음반들 몇 개와 함께 주민 씨 방에 두었다.
④ 특별지출 — 취미 밴드 합주 3회 54,100원
취미로 해오고 있는 밴드 ‘조기축구회’21의 공연 날이 머지않았다. 3월 중 공연을 기획하고 있어 매주 한 번씩 합주해야 제대로 된 무대를 선보일 수 있다. 매번 3시간 정도 합주실에서 연습을 하며, 6명이 대관료를 분담하기 때문에 부담이 크지 않다. 베이스를 치는 친구가 매번 총무를 자처해서 대부분 카카오페이로 나중에 돈을 보내주게 된다. 이번 달엔 1월 5일, 1월 12일, 1월 19일 세 번 합주했다.
⑤ 식비 — 인턴 밥, 커피 사주기 3회 46,500원
우리 회사는 인턴이 오면 밥값을 내지 않게 하는 전통이 있다. 올해도 2월 중순까지 일하는 인턴은 우리 팀 직속 후배여서 팀이 다 같이 밥 먹는 일도 많아졌고, 점심을 대충 먹는 것으로 식비를 아끼기 어렵게 되었다. 직원들이 한 명씩 차례로 ‘이번엔 제가 인턴 밥까지 낼게요’ 하는 것이 나에게 두세 번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