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잇
“사랑해.”라는 말 대신
“우유 사기”라고 적혀 있다.
-포스트 잇-
예전에는
냉장고에 붙은 포스트잇을 하나하나 챙겨 읽곤 했다.
“잘 다녀와요.”
“오늘 저녁은 불고기!”
“화이팅♥”
그녀는 종종 그런 메모들을 남겨뒀다.
형광 노란색 포스트잇에 적힌
짧은 문장들이
그날 하루의 기분을 결정하곤 했다.
바쁜 출근길에 스치듯 지나친 글자 하나에도
그녀의 마음이 느껴졌고,
괜히 나도 따라 웃게 되곤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메모는 바뀌기 시작했다.
“우유 사기”
“화장지 떨어짐”
“세탁기 필터 청소 좀”
이젠 냉장고엔 사랑이 아니라
할 일 목록만 남아 있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살다 보면, 애정이란 것도
점점 말보단 역할이 되고
표정보단 기능이 되어간다.
‘사랑해’라는 말보다
‘우유 사와’가 더 자주 오가는 사이.
언뜻 보면 무심해 보이지만
사실 그 안에도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예전처럼 티 내진 않아도
그녀는 여전히 나를 챙긴다.
바닥에 떨어진 양말을 주워 세탁기에 넣고,
말없이 내 컵을 다시 채워주고,
내가 좋아하는 장조림을
소리 없이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둔다.
그녀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함께 살아가는 시간이
‘표현’보다 ‘기능’에 더 가까워졌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가끔,
그 ‘기능’에 너무 길들여진 나 자신을 본다.
예전에는 작은 변화도 금세 눈치채던 사람이었는데,
이젠 포스트잇을 봐도
그냥 지나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오늘은 별일 없었어?” 하고 물었을 때
나는 무심코 “똑같았지 뭐”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녀의 표정이 살짝 굳는 걸 봤다.
그 말이 서운했을까?
아니면, 그조차 별일이 아니라고 느끼는 내 삶이
서글펐던 걸까?
그날 밤,
괜히 혼자 냉장고 앞에 서 있었다.
붙어 있는 포스트잇엔
역시나 익숙한 글씨.
“우유 사기.”
그걸 보는데
마음이 묘하게 아렸다.
나는 왜, 이렇게 간단한 말 한마디조차
오래 붙잡아두고 있는 걸까.
그게 단순한 할 일처럼 보여도
어쩌면 그녀는 여전히
내 일상에, 내 시간에
자신의 자리를 남기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나도 조심스레 포스트 잇을 한 장 꺼냈다.
“우유는 사왔고,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도 잊지 않았어요.”
짧게 적고,
커피포트 옆에 붙여두었다.
괜히 웃음이 나면서도
조금은 떨리기도 했다.
이 나이에 무슨, 포스트잇 고백인가 싶으면서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다.
다음 날 아침,
냉장고 옆에 붙어 있던 새로운 메모 하나.
“가끔은 이런 게 더 고맙네요 :)”
그녀의 반응은 짧았지만,
그 안엔 긴 여운이 담겨 있었다.
그날따라 출근길이 가볍더라.
차 막히는 도로마저도
괜히 부드럽게 느껴졌다.
사랑은
예전처럼 말로 포장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사라진 건 아니다.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삶의 구석구석에 조용히 스며들 뿐이다.
냉장고 옆의 포스트잇 한 장처럼.
평범한 메모인 듯하지만
그 안엔 ‘당신을 잊지 않았다’는 마음이 들어 있다.
그걸 알아채는 사람만이
사랑을 오래 지켜낼 수 있다.
‘우유 사기’라는 글씨 너머에 숨어 있는
“내가 오늘도 널 생각했어.”
그 조용한 고백을
나는 다시, 매일 읽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