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닦아도 남는 것들이 있다

창문

by 라이트리
유리는 닦아도 닦아도 얼룩이 남아.
혹시 너 마음도 그러니?

- 창문 -


창문을 닦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유리는

아무리 닦아도 얼룩이 남는 걸까.

창문 닦는 일이 뭐 별거 있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걸레를 들고 시작하면

의외로 시간이 걸린다.

세제를 뿌리고 닦고,

또 마른 천으로 닦고,

햇살을 비춰가며 얼룩이 남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그런데 그렇게 정성 들여 닦아도,

빛이 드는 방향만 조금 바뀌면

어김없이 보인다.

손자국, 물 얼룩,

내가 지나간 흔적들.


그러다보면

내 마음이 유리처럼 느낀다.

투명한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문득 비춰보면

어딘가 닦이지 않은 얼룩이 남아 있는.


그게 미련일까.

서운함일까.

아니면 그냥,

말하지 못한 감정들의 침전물일까.

생각해보면

살면서 여러 번

‘이젠 괜찮아’라고 말해왔던 것 같다.

상처를 받았을 때,

이별을 했을 때,

누군가를 원망했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 실망스러웠을 때.


그럴 때마다

마음을 닦는 척을 했다.

명상도 해보고,

좋은 말을 되새기고,

애써 웃기도 하고,

‘지나간 일이다’라고 말하며

덮고, 밀고, 또 밀어냈다.


그런데 그런 마음들이

정말 지워진 건 아니었더라.

어느 날 문득,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일이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다시 떠오르고,

햇살 좋은 날

커튼을 걷은 순간

그 감정의 잔상이

창문 너머처럼 흐릿하게 드러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내 마음이 너무 번거롭게 느껴진다.

왜 이렇게 깔끔하지 못할까.

왜 자꾸 끈적하게 남아 있는 걸까.

왜 아직도 그 말을 기억하고,

그 표정을 떠올리고,

그 순간의 냄새까지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걸까.


하지만 이제는 안다.

마음은 닦는다고

완전히 깨끗해지는 게 아니라는 걸.

그냥 남는 것들이 있는 거다.

지운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저 잘 보이지 않는 자리에

잠시 가려져 있었던 것뿐.


유리도 그렇다.

햇살이 없으면 얼룩이 잘 안 보인다.

밤에는 투명해 보이고,

어두운 날엔 그저 거울 같기도 하다.

하지만 햇빛이 정면으로 들어오는 어느 오전,

그때야 비로소

거기에 얼마나 많은 흔적이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


마음도 빛이 필요하다.

내 안의 얼룩을 마주하기 위해서라도.

그게 지우기 위한 게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위한 빛.

“이만하면 됐지”라고 말해주는 빛.

얼룩이 있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따뜻한 시선.


나는 오늘도 창문을 닦는다.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햇살이 더 잘 들어오게 하려고.

얼룩이 있어도,

빛은 통과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나를 보며

문득 웃음이 난다.

나는 오늘도 마음을 닦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얼룩들을

하나하나 다 없애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다시 비추고 싶어지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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