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 매너 지키기
집에 물건을 쌓아두고 사는 걸 싫어하는 편이라 남편이랑 단둘이 살 때도 집에 놀러 온 친구가 '아직 이삿짐 다 안 들어온 거지?'라는 질문을 할 정도로 집을 텅텅 비워놓고 살았다. 아기가 생기니 짐이 너무 많아졌다는 느낌이 들어서 요즘 당근거래를 많이 하고 있다. 당근의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거래도 있지만 충격적일 정도로 비매너인 상대방을 만나는 분노의 거래도 종종 경험한다. 만나기로 해놓고 아무 연락 없이 날 차단하고 구매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사람, 무턱대고 가격을 깎는 사람, 답장을 너무 느리게 하는 사람, 이상한 질문을 하는 사람, 처음부터 다짜고짜 반말하는 사람 등 당근을 통해 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다고?'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황당한 일들을 겪으며 분노했지만, 거래 온도가 올라갈수록 어떤 일이 생겨도 무덤덤해졌다. 감정적으로 예민하게 반응할 때마다 나만 손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당근 근육'이 생겨나기 시작함과 동시에 부작용이 나타났다. 내가 비매너 거래자들과 비슷해져 가기 시작한 것이다. 상대방에게 친절을 베풀거나 배려해도 그 친절과 배려가 돌아오지 않고 심지어 상처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는 걸 깨닫고 어느 날부턴가 채팅이 걸려오면 무뚝뚝하게 대답하기 시작했다. 내가 비매너 거래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충격을 받은 건 거래 상대방이 답장을 너무 느리게 해서 '이 사람과는 거래 성사가 안 되겠다'라고 짐작하며 양해를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거래했던 날이었다. 상대방이 나에게 '매너 좀 지켜주세요'라는 말을 했고, 스스로를 매너 거래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꽤 충격을 받았다. 상대방이 비매너로 나온다고 해도 나는 최대한 매너를 지키려고 노력했어야 했는데, 그 사람과 똑같이, 아니 어쩌면 더 심한 비매너 거래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 일로 인해 당근 거래뿐 아니라 주변 사람에게 내가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지 주기적으로 점검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당근 거래는 일회성이지만 자주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큰 영향을 받을 테니. 이 사람에게 배울 점은 무엇인지, 이 사람에게 물들고 싶지 않은 점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체크해야지. 배울 점이 별로 없는 사람도, 그 사람의 잘못된 행동을 관찰하며 조심해야지 마음먹었다. 하지만 당근과 달리 곁에 어떤 사람들을 둘 건지, 어떤 사람들을 자주 만날지는 내가 어느 정도 선택할 수 있으니 이왕이면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을 곁에 두는 게 좋은 것 같다. 나쁜 건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빨리 배우기 때문이다. 자극적인 음식을 자주 먹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나도 모르게 그 음식을 자꾸 찾게 되는 것처럼. 나 스스로도 내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건 덤.
당근거래를 할 때는 어떤 상대방이 불친절하게 나왔다고 해서 모두가 불친절할 거란 전제를 버리고 최대한 객관적인 태도로 (대신 너무 투머치 매너는 지양) 좋은 거래가 될 수 있도록 애쓰려 한다. 나와 거래하는 사람들이 나랑 거래한 날을 운수 좋은 날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