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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봇 Dec 23. 2022

얹혀사는 아이

내가 초등학교 입학통지서를 받았을 때, 우리 가족은 이름도 잘 기억 안 나는 어느 지방 시골마을에 있었다. 무덤으로 둘러 쌓인 그런 산골짜기 집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차 없이는 시내 나가기도 힘든 그런 시골이었다. 당시 우리 부모님은 학부모가 된다는 벅찬 기대감보다는 내 학교 문제로 고민에 빠졌다. 내가 집에서 다닐 초등학교는 아무리 가까워도 무조건 차를 타고 나가야 하는 곳이었는데, 집이 넉넉지 않은 관계로 부모님은 차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갑작스러운 복통을 호소하는 응급 상황일 때도, 아빠가 있는 부대로 전화해 부대차를 빌려 타고 병원에 다니던 그런 상황이었다. 학교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 하더라도 엄마는 나랑 5살 차이가 나는 어린 동생을 돌보고 있었기에 버스 등하교를 함께 해주기에는 너무나 무리가 있었다. 결국 부모님의 선택은 나를 외가로 보내 학교에 입학시키는 것이었다.


엄마는 인천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었고, 할머니. 할아버지를 비롯해 이모, 삼촌 모두 인천에 터를 잡고 살고 있었다. 나는 이모집에 보내졌는데, 이모는 나보다 3살, 7살 위인 언니 둘을 키우고 있었다. 언니들은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인 학교와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나도 이모네서 살면 언니들과 같은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특히 터울이 적은 둘째 언니랑 같이 등하교를 하면 될 일이었다. 이모는 집안일과 바깥일로 늘 바빴지만, 이모를 대신해 나름 나를 챙겨줄 언니들이 있고, 학교와 학원 전부 집에서 가까우니 충분히 혼자 알아서 다닐 수 있는 환경이었다. 엄마는 초등학교 입학식 때만 함께 가줬다. 그리고 바로 아빠와 동생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나는 이모집에 얹혀살게 되었다.


엄마는 이모에게 다달이 내 생활비를 보내주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엄마가 보내는 생활비와 상관없이 이모는 정말 나를 언니들과 차별 없이 대해줬다. 다 같이 시장에 갔을 때 누가 물어라도 오면 그냥 딸이 셋이라고 그랬고, 이모부도 내가 함께 사는 걸 그리 개의치 않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이모랑 이모부가 잘해줘도 겨우 8살이었던 나는 엄마 아빠가 그리울 때가 많았다. 학교 밖에서 반 친구들을 마주쳤을 때, 우리 이모라고 소개하면, 너는 왜 이모랑 같이 사냐고 물어왔다. 솔직히 그냥 엄마가 학교 때문에 이모네서 살아야 한다고 해서 온 거지, 자세한 내막은 몰랐기에 친구들에게 내가 왜 이모네서 사는지 설명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입을 다물 때면 스스로가 부모 없는 아이처럼 느껴졌다.


나도 모르는 새에 파고든 외로움으로, 엄마랑 전화 통화를 할 때면 이모가 밥을 안 준다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이모가 바로 옆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다행히 엄마는 그 거짓말을 믿지 않았다. 그때는 내가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엄마에게 동정표라도 얻어 당신 딸이 여기서 외로워하고 있다고 알리고 싶었나 보다. 이모는 내가 되지도 않는 모함을 하는데도 그런 걸로 구박 한 번 한 적 없이, 학교에서 작은 상이라도 타오면 함께 기뻐해주고 밥도 배불리 먹였다. 나중엔 이모를 엄마라 부르고, 엄마를 이모로 부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말이다. 그렇게 1년간 이모네서 학교를 다니다가, 아빠가 다른 곳으로 다시 전근을 가며 나는 가족들과 다시 합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모네서 먹는 거며 입는 거며 배우는 거며 큰 부족함 없이 지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때 느꼈던 혼자인 것만 같던 외로움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진 종종 그때가 내가 심적으로 가장 외로웠던 적이 아니었다 생각할 정도다. 몸이 얹혀 산다고 마음까지 완전히 얹혀살 수 있는 건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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