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병장에서의 추억
애들한테 1년 중 제일 좋아하는 날을 물어보면, 아마도 어린이날과 크리스마스를 꼽지 않을까?
둘 다 그저 어린이라는 이유만으로 선물을 받는 날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단연코 둘 중에 크리스마스를 더 좋아했는데, 신비한 존재인 산타에게 선물을 받을 수 있는 날이라는 게 너무 매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성탄절마다 목욕탕을 데리고 갈 정도로 그날을 평범한 공휴일 취급 했지만, 그래도 당신들이 산타라는 걸 직접 밝히기 전까지는 천가방이나 종합과자선물세트 같은 어린이용 선물을 이브 날 밤, 머리맡에 두고는 하셨다.
하지만 그에 반해 어린이날이라고 특별한 선물을 받거나 한 기억은 없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정말 기억나는 어린이날 선물이 없다. 그럴 만도 한 게 군대에서 어린이날을 대신 챙겨줬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린이날 하루 전 날인 5월 4일, 군인 자식들을 위한 어린이날 행사가 있었다. 모든 군인 자식들에게 해당되는 건 아니고, 군부대가 모여있는 특정 지역에 한해서였다.
그날이 되면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안으로 몇 대의 관광버스가 들어왔다. 선생님들은 어디로 가는지 말도 안 해준채 서둘러 애들을 버스에 태웠다. 아무 생각 없이 버스를 타고 가다가 내린 곳은 엄청난 규모의 군 연병장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내 눈에는 마치 월드컵 경기장마냥 연병장이 크게 느껴졌었다. 거기에는 우리뿐만 아니라 같은 지역, 다른 초등학교 애들도 단체로 몰려와 있었는데, 때문에 연병장 앞으로 관광버스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그곳에서 볼 수 있었던 어린이날 행사는, 군부대답게 특공대의 시범행사였다. 의장대, 헌병대, 군악대, 특전사들이 한 데 모여있어, 이곳이 어린이날 행사장인지, 국군의 날 행사장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순서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도 보통 육군 의장대를 시작으로, 헌병대의 오토바이 행진, 군악대의 공연이 이어진다. 그리고 이 행사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특전사들의 시범이 시작되는데, 태권도 공연에서 볼 수 있는 수십 개의 나무판자 뽀개기부터 벽돌, 나아가 콘크리트까지 쪼개면서 차력 공연을 방불케 했다. 심지어 서커스에서나 볼 수 있는 커다란 원형에 불을 붙여, 사람이 그 안으로 뛰어들기를 반복해서, 특전사는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인가 궁금해하기도 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군인들은 낙하산을 매고 손을 흔들며, 아이들이 있는 연병장으로 고공낙하까지 했다. 어린이날 행사는 빌미고, 그냥 특공대 정기 훈련을 하는 건 아닌가 의심되는 수준이었다. 여기에 공군까지 합세해 실제 전투기를 띄우면서 행사가 마무리되는데, 5개 정도의 전투기가 빨강, 파랑, 노랑 등 색깔별로 연기를 뿜어내며 연병장에 닿을 듯 매우 가깝게 비행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일어나 기립 박수에 여린 목청으로 낼 수 있는 최대의 환호성으로 보답해 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이날 행사에 이 정도 퀄리티로 준비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하는 의아함도 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때 초청받은 어린이들이 대부분 군인 자녀였기 때문에 한껏 더 신경 썼을 것 같기도 하다. 나만해도 초등학생 때 정확히 아빠가 무슨 일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군인은 나라를 지키는 사람이라고 가르쳤지만, 감사하게도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이기에 얼마나 힘든 훈련을 받고, 대단한 일을 하는지 체감하기는 어려웠고, 그저 다른 회사원들처럼 매일 출퇴근을 반복하는 아빠라고 여겨졌다. 다른 점은 정장 구두가 아니라 군복, 군화라는 것뿐이었다.
그런 군인 엄마 아빠들을 대신해 부대에서 친히 너희 부모님들은 이런 훈련을 받았고, 이런 걸 할 줄 알고, 이런 데서 일을 한다라고 대신 알려주는 일환으로, 어린이날 행사를 기획할 때 중점을 뒀을 것 같다. 그래서 시범 공연 이후에는 몇몇 군대 내부 공간이나 탱크, 특수 헬기 등의 견학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견학 후에도 여전히 내가 집에 돌아와 마주하는 아빠와 연병장에 가서 본 특전사들과는 꽤나 큰 괴리감이 느껴졌지만 말이다.
어린이날에 가족들과 놀이 공원 한 번 가본 적이 없다는 게 실망스러울 때도 있지만, 대신 나는 연병장에서의 추억으로 만족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