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맛바람, 헬리콥터 맘 등 자녀의 학교 생활에 필요 이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간섭하는 부모를 뜻하는 단어들이 있다. 이런 단어들이 있다는 건 동, 서양을 막론하고 실제로 그런 부모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이런 단어들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아빠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가정적인 아빠이기보다는 사회생활을 열심히 하는 아빠 쪽을 택했으며, 아무리 자녀여도 '네 인생은 네 인생, 내 인생은 내 인생'이라는 모토를 가지고 있는 분이라, 내 학교 생활에도 큰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학교나 전공, 진로에 관한 고민을 할 때도 크게 특정 선택을 강요한 적이 없었으며, 선택의 갈림길에서 도움을 구할 때도 '네가 알아서 판단해서 너한테 좋은 쪽으로 해라'였기 때문에 나는 생각보다 꽤 많은 선택들을 혼자 고민하고, 내 뜻에 의해 결정한 것들이 많았다. 좋게 얘기하면 독립적으로 키운 거라 할 수 있겠지만, 다르게 말하자면 일종의 방목형이기도 했다.
엄마는 방목까지는 아니었지만 사실 아빠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말 꼭 학교에 와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가 다니는 학교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고, 전화 상담도 내가 아파서 결석할 때만 이용할 뿐이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엄마는 내가 반장이나 학급 임원이 되는 것도 그리 추천하지 않았는데, 학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면 덩달아 그의 엄마들도 학부모회 같은 모임에 가입을 권유받고 바빠지기 때문에 그게 싫다는 이유였다. 엄마가 굳이 그러지 않아도 나는 워낙 소심한 성격 탓에 학교에서 눈에 띄는 생활을 한 적이 없음에도 말이다.
내가 다니던 시골학교에서는 유달리 학부모들을 학교에 불러내는 일이 많았다. 학교 운영에 관한 상담이나 내 학업 성적에 관해서가 아니라 진짜 일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학교 예산이 부족한지, 학교에 일 할 사람이 부족한 건지, 학부모들한테 급식실 일을 시키기도 했다. 돌아가면서 주기적으로 학교에 와서 아이들 급식을 만들고 배식, 설거지에 참여하라는 것이었다. 만일 못 올 경우 대신 사람을 고용할 수 있게 회비를 내라고 했으니, 그냥 애초에 급식비나 학교 운영비를 더 요청할 것이지 왜 돈 버느라 바쁜 부모들을 붙잡고 그런 일까지 시켰는지 의문이다.
엄마는 가정주부였으나 내 학교 일에 관여하는 걸 굉장히 불편해해서, 너네 학교는 왜 자꾸 사람을 오라 가라 부르는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가정주부라고 해서 시간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결국 엄마는 학교에 한두 번 가보고 그다음부터는 없는 살림에도 학교에 회비를 더 내는 쪽을 택했다. 사실 나도 가족들 앞에서의 자아와 학교에서의 자아에 차이가 있었으므로, 부모님이 학교에 자주 오면 오히려 신경만 쓰여 혼란스러웠기에 그 편이 편했다. 그래도 엄마는 초, 중, 고등학교 입학식과 졸업식만은 꼭 와서 꽃다발을 주고 밥을 사줬지만, 아빠는 단 한 번도 그 어떤 입학식과 졸업식에도 온 적이 없었다.
그런 아빠가 딱 한 번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온 적이 있다. 그것도 그냥 온 게 아니라 군용 덤프트럭을 끌고 말이다. 그 학교는 학생 수가 얼마 없는 시골 학교여서 그런지, 툭하면 운동장으로 전교생을 불러내서 조회를 했는데, 당시 성장이 빨랐던 나는 키가 커서 맨 뒷줄에 서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건설현장에서나 볼 수 있는 크기의 덤프트럭, 그것도 온통 짙은 녹색인 군용 덤프트럭이 운동장으로 들어와서 놀랐고, 거기서 군복을 입은 아빠가 내려서 다시 한번 기겁했다.
군용 덤프트럭 안에는 모래가 한가득 쌓여있었는데, 학교 운동장 양쪽 가장자리에 멈춰 서더니 그 많은 모래를 한꺼번에 다 바닥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싣고 온 모래의 양이 어찌나 많았는지, 그 모래들을 다 뱉어내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아빠는 운동장에 서 있는 나한테 와서 뭘 하고 있느냐 물었고, 나야말로 아빠가 학교에 웬일이냐고 물었다. 그러고 대답은 "교장 선생님이 불러서"였다.
학교에서는 체육 수업의 일환으로 멀리 뛰기 수업과 달리기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운동장에 모래가 부족해 아이들이 쉽게 부상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교장 선생님은 본인 학교에 부대 관사에 사는 애가 있다는 걸 알아냈고, 그 아이 아빠에게 전화해 모래 기부를 부탁한 것이었다. 부탁이었는지 뭐였는지 모르겠지만, 아빠 입장에서도 교장 선생님이 부대로 직접 전화해 당신 자녀가 다니는 학교에 모래 좀 갖다 달라고 하는데 거절하기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사실 시골 바닥에 깔린 게 논밭이고 산이라 학교 입장에서도 모래를 구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테지만, 아빠에게 전화하면서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운동장에 곱게 모래를 깔 수 있었다. 그걸 너무 자연스럽게 학생 부모에게 부탁할 생각을 한 교장선생님도 어떤 의미로는 대단해 보였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빠가 내가 다니는 학교에 직접 온 일은. 심지어 학부모로서가 아니라 모래 배달원으로. 그때는 그렇게 느닷없이 군복을 입고 운동장에 나타난 아빠의 모습이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비록 모래 배달원으로 학교에 왔을지라도 나는 그런 행동이 아빠 나름대로 나의 학교 생활을 신경 쓰고 있다는 표현이었다고 이해하고 있다. 소규모 학교였기에 아빠가 학교 선생님들에게 호의적이면 내 학교 생활도 호의적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에서 말이다. 그 모래들은 결국 학교 운동장에 곱게 깔려 유용하게 사용되었고, 나는 한동안 모래를 볼 때마다 아빠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