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기간을 채우지 않고 이사를 한다고 하면, 집주인이 길길이 날뛸 줄 알았다. 하지만 계약대로 보증금은 깨끗이 포기하겠다고 하자, 그도 더 이상 우리를 붙잡지 않았다. 사실 집주인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연락이 안 되는 경우도 별로 없었고, 깜박하고 월세 보내는 기한이 늦어져도 독촉 한 번 하지 않았다. 집에 세탁기가 고장 나거나 배수 문제가 생겼을 때도, 새로운 걸로 교체를 해주지는 않았지만 수리공은 바로 불러주는 사람이었다. 나름 세입자들을 신경 쓰는 사람이었는데, 문제는 그 집 자체였기에 우리는 떠나야만 했다.
거너와 이사 가기로 합의를 한 후, 바로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친구를 통해 부동산 중개인을 소개받기도 하고, 매물 사이트도 많이 뒤져봤지만 생각보다 ‘이 집이다’ 싶은 곳이 없었다. 사진과 다른 점이 많아 기대하고 가보면 막상 현재 살고 있는 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또, 집을 구하고 이사 날을 잡기까지는 어떻게든 현재 집에 머물러야 했는데, 바퀴벌레가 좀비 떼들처럼 들이닥치는 사건을 겪은 이후, 도저히 그 집에 혼자 있을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거너가 24시간 내 옆에 붙어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거너가 출근하는 시간에 나도 같이 나갔다가, 그가 퇴근 후에 집에 돌아오기로 했다. 파트타임으로만 일하던 나는, 밖에 나가서 편히 있을 장소가 필요했고, 그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내 사정을 들은 한 친구가, 친히 자기 집 열쇠를 내게 넘겨준 것이다.
아직 키패드보다는 열쇠를 주로 쓰는 외국 드라마를 보면, 여분의 집 열쇠를 누군가에게 주는 게 ‘관계의 발전’을 상징하는 로맨틱한 장면으로 표현된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집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친구는 셰어하우스에 살고 있지만, 그 집은 지대가 높은 곳에 있어 비가 와도 침수가 잘 안 되고 벌레도 많지 않은 집이었다. 도저히 혼자 집에 못 있겠다고 했더니, 내가 없어도 거실과 내 방에서는 자유롭게 있어도 된다며 친구가 여분의 집 열쇠를 내게 건네주었다. 아무리 친구 관계여도, 마음대로 와 있으라고 열쇠를 주기는 쉽지 않은데, 그녀의 선의에 내 눈에는 하트가 떴다. 이성 친구였다면 내가 먼저 프러포즈를 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일주일을 낮에는 친구 집, 밤에는 우리 집에 있으면서 이사 갈 곳을 알아보았다. 지난번처럼 대충 고르다가 보증금도 날리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이번에는 보다 더 신중을 기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손품과 발품을 팔면서도 막상 그에 맞는 이득은 얻을 수 없었는데, 여느 날처럼 친구 집에서 시간을 보내다, 페이스북으로 빈방 홍보를 하는 부부의 글을 보게 되었다. 마침 위치도 친구 집에서 5분 거리라 슬슬 걸어간 후 방을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5층 짜리 신축 건물이었고, 1층에는 오토바이 주차장과 부부의 방이 있었다. 5층은 옥상, 나머지는 층에는 방이 각각 두 개씩 있는 건물이었다.
집 크기는 현재 있는 집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작았다. 흔히 원 베드룸이라고 하는 방으로, 거실과 방 1개, 이렇게 두 칸으로 나누어져 있는 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곳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집은 작아도 내가 원하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다. 신축이라 화장실, 가구가 전부 깔끔했고 군더더기 없이 필요한 만큼만 있었다. 옷장도 하나밖에 없었지만, 애초에 거너와 나는 옷이 별로 없었기에 두 칸으로 나눠 각자 사용이 가능했다. 침대, 책상, 소파, 테이블, 세탁기 전부 있었고, 심지어 작지만 베란다까지 있어 방에서 바로 빨래를 널 수도 있었다. 집에서 요리해 먹는 일이 많은 우리는 적당한 크기의 냉장고도 필요했는데, 원 베드룸치고 냉장고도 넉넉했다. 거기에 더 좋았던 점은 월세가 현재 집과 비교해 굉장히 저렴하다는 것이다. 월 35만 원, 이 안에 전기세 빼고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휴지와 새 수건이 무료 제공되고 식수비도 아낄 수 있었다. 옥상에 정수기가 있어 거기서 식수를 받아먹으면 되기 때문이다. 내가 본 방은 2층에 있어서, 비가 많이 와도 거기까지 물이 들어올 일도, 살기 위해 몰려오는 바퀴벌레떼를 볼 일도 없을 터였다. 더 좋은 건, 일주일에 한 번 청소 서비스까지 있다는 것이다. 방이 작아 청소할 일이 많지는 않아도, 침대 시트 빨래와 화장실 청소, 바닥 청소가 월세에 포함되어 있었다. 집 크기만 줄이면 이렇게 행복해지는데 왜 처음에 괜히 넓은 집에 한 번 살아보겠다고 그 많은 비용과 불편을 감당하고 살았는지 스스로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거너에게 찍어간 집 영상을 보여주고, 위치만이라도 직접 확인하고 싶다는 그와 함께 밤에 다시 방문했다. 집은 다낭에서 유명한 ‘미케 비치’에서 걸어서 10분 거리, 외국인들이 많은 ‘여행자 거리’와도 아주 가까웠다. 여행자 거리가 가깝다는 얘기는 외국인들이 이용할 만한 편의시설이 많다는 의미기도 하다. 거너는 집이 너무 작다는 게 걸렸지만, 가격이 마음에 들어 이사를 하기로 결정했고 우리는 그 주 주말부터 오토바이와 택시를 이용해 이삿짐을 나르기 시작했다. 이 집은 보증금도, 특정 계약 기간도 요구하지 않았다. 제때 월세만 내면, 원하는 만큼 살다가 떠나고 싶을 때 떠나도 되는 아주 자유로운 집이었다. 이곳으로 이사 후, 나는 처음으로 베트남에서 시간이 빨리 흐른다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