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가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이유
나는 세상 태어나서 기계를 산 후에 그 안에 있는 매뉴얼을 읽어본 적이 없다. 혹여나 꼭 알아야 될 기능을 아무리 기계의 버튼들을 눌러봐도 못 찾겠을 때만 매뉴얼을 뒤적여 찾아보지 (밥통 청소 방법 정도?) 나에게 매뉴얼은 읽어보기 위해 만든 글이라기보다는 없으면 기업에서 출시가 안되기에 제품에 엉겁결에 붙여 나오는 새 물건임을 알리는 표딱지 같은 것이다.
우리 집 독일 엔지니어는 전자 기기를 사면 매뉴얼을 꼼꼼히 읽.는.다. 그렇게 기계에 접근하니 모든 기능을 사용 전에 대부분 섭렵한다. (vs 나는 기계 사용에도 미니멀을 추구(?)하기에 기본 기능 딱 하나만 알면 더 알고 싶지도 않다.) 그리고 매뉴얼을 읽지 않고 기계에 있는 버튼을 마구 누르면서 사용방법을 익히는 나를 원시인 보듯이 한다. 뭐라도 잘못 누르면 어쩔 줄을 모르며 기계 망가진다고 난리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해서 망가질 거면 팔면 안 된다고 펄펄 뛴다.
내가 원래부터 기계치는 아니었다. 처음 PC가 보급된 시절에 제법 컴퓨터도 잘 다루고 웬만한 기계가 잘못되면 두드리거나 (?) 껐다 켜 가면서 고칠 수 있는 정도의 상식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독일로와 엔지니어와 화촉을 밝힌 후 기계에 대한 지식에 너무 큰 차이가 나다 보니 기계에 문제가 생기면 뭐든지 자신이 고쳐놔야 직성이 풀리는 남편을 불러서 고치게 만들게 되었고 아무래도 별볼일 없던 기계에 대한 나의
지식과 감각은 점점 더 비루해지기 시작했다. 이상한 말이지만 인덕션이 망가졌거나 컴퓨터가 말썽 부릴 때 어쩔 때는 남편을 불러다 옆에 세워놓기만 해도 갑자기 멀쩡하게 작동되기도 했다.
기계뿐 아니라 자동차를 다루는 능력도 급속도로 후져졌다. 집에서 직장이 멀기 때문에 주행거리가 100킬로가 넘게 매일 장거리를 뜀에도 불구하고 자동차에 대한 지식은 액셀 밟기, 브레이크 밟기, 운전대 돌리기 이렇게 3가지로 압축되어 뇌에 저장되어 있고 자동차에 문제가 생겼을 때 대처 능력도 ‘모르면 전화해서 물어보지’로 입력되어 있다.
남편은 심지어 (운전은 내가 훨씬 더 많이 하는데도) 일주일에 한 번씩 여기저기 정비도 해주고 기름도 넣어준다. 이런 고품격 친절과 서비스를 베푸는 것은 나를 사랑해서라기보다 본인이 자동차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일 지언데 그러다 보니 나는 슬프게도 기계과 자동차에게서 점점 멀어져만 간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어야 하는데 나는 훈장님의 커다란 기계 사랑에 팽당해서 서당개의 본분을 잊고 풍월도 개나 줘 버렸다.
얼리 어답터까지는 아니지만 나는 새로운 전자제품, 앱, 기계 등에 대한 호기심만은 충만하다. 궁금하긴 한데 그것을 사서 먼저 공부하고 사용 방법을 알아내고자 하는 욕구는 제로이다. 배우는 것은 너무 귀찮지만 궁금해서 뭔지만 알아보고 싶다. 이럴 때는 남편에게 그 물건을 사보라고 슬며시 권하거나 어떻게 쓰는 것이냐고 넌지시 물으면 문제가 대번에 해결된다. 기계 친화적이고 궁금한 것을 못 참고 뭐에 대해 알아볼 때 미친 듯이 올인해서 끈덕지게 조사하는 남편은 내가 알아보고자 하는 기계나 앱에 대해 완벽 조사를 마친 후 진액만 보고를 해준다. 바로 이거지. 귀찮은 것은 건너뛰고 이렇게 꿀만 빨면 된다.
부부가 같이 살다 보면 서로 배워가면서 발전하는 점도 있지만 서로 기댈 수 있기에 가지고 있는 약점이 더 약해지기도 한다. 기계에 대한 모든 권력과 지식을 기계공학과 공돌이 앞에서 너무 가볍게 빨리 포기해 버렸다. 여러모로 나에게 이익이기 때문에 (귀찮은 모든 것을 해결해 주기에) 꿀만 빨려고 하던 어느 날 뜨악할 정도로 놀라는 일을 목격하게 되었다—-애들까지 자기처럼 매뉴얼을 읽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기적인 유전자가 퍼뜩 생각났다.
애들이 어렸을 때 장난감을 사거나 조금 더 커서 전자기기를 살 때도 남편은 매뉴얼의 페이지를 넘겨가며 읽어주며 어디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 기능설명을 가르치면서 키웠다. 그리하여 애들은 둘 다 매뉴얼을 읽는 사람이 되었다. 큰 아들은 그 유전자를 그대로 받아 기계공학과에 입학했고 딸내미 역시 비슷한 결로 크고 있다. 재봉틀을 가지고 싶어 해서 생일날 사줬더니 생일날의 반나절을 재봉틀 매뉴얼을 읽는 것으로 보냈다. 그냥 인정. 매뉴얼 읽는 DNA가 우성인 것으로.
이런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독일에서 레고는 실패할 수가 없다. 레고를 산 후에 메뉴 얼 데로 그대로 만들어 모으고 장식하는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나는 어렸을 때 레고를 가지고 놀 때 처음 한 번만 매뉴얼대로 만들어 보고 그 후부터는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었지 다시는 똑같이 매뉴얼 따라 만들어 보거나 만든 것을 그대고 보관해 본 적이 없었다. 독일에는 어른들조차도 장식장에 레고 조립한 것을 두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딱 한번 매뉴얼 따라 조립하려고 레고를 산다니 레고 회사에서 좋아라 하겠다. 시리즈 별로 다 사모을 테니…
가족에서 약간 소외되는 것 같아 지난번에 스무디 기계를 샀을 때 매뉴얼을 좀 읽어보려다 첫 페이지에 전력이 어쩌고 저쩌고 해서 그냥 던져버렸다. 생긴 데로 살련다. 그런데 귀찮을 때마다 남편에게 시키고 남편이 더 잘하는 일이라고 자꾸 미루다 보니 내가 기계를 다루는데 바보가 된 것 같아 서럽긴 하다. 이게 뭐라고...
그냥 난 기계보다 사람에게 훨씬 더 관심이 많은 것으로 멋지고 맘 편하게 결론을 내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