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나의 만행
먼 옛날이야기지만 결혼 전에 독재자처럼 남편의 행동을 강제로 뜯어고친 사건이 두 건 있다. 심각한 흡연자는 아니었지만 때때로 (하루 한 개비나 두 개비, 일 끝나고) 담배를 피우던 남편에게 나랑 결혼하고 2세를 가지려면 당장 끊어야 한다고 공표했다. 당시 철없었던 나는 남편의 건강을 볼모로 (특히 내가 담배냄새를 잘 못 참기에) 옳은 일이니까 담배를 끊게 강제해도 된다고 믿었었고 당당하게 명령했다. 나의 협박에 남편은 대번에 담배를 끊었고 (나를 지극히 사랑해서라기보다 끊으려고 부단히 애쓰고 있던 차였기에) 그 후로 정말 한 번도 내 앞이나 집에서 담배를 피운 적이 없다. 20년 동안 한 두 번 어쩌다 밖에서 피우게 된 적이 있는 모양인데 집에 와서 즉각 나에게 보고를 했다.
또 다른 업적, 아니, 만행은,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하는데, 남편의 애마, 모터바이크를 팔게 한 일이다. 연애할 때에는 몰랐는데 결혼 후 독일에 와 보니 남편은 모토사이클 광이었다. 우리는 한국에서 만나서 알게 되었기에 내가 아는 남편의 모습은 '한국이라는 환경 안에서의 그'였고 독일로 오더니 남편은 그동안 일부러 감춘 것은 아니겠지만 숨겨졌던 '제2의 자아'를 나에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제2의 자아는 한국이라는 환경에서는 발현되지 않았던 '특유한 독일인의 모습'과 함께 나를 만나기 전 ‘자유롭게 살았던 싱글남의 화려한 실상'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동안 독일 창고에 박혀 있었던 남편의 모터바이크는 BMW 은색으로 나름 폼나는 모델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모터바이크는 배달용으로 쓰이고 위험천만하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헬멧 없이 타다 수시로 사고를 내고 당하며 목숨을 잃기도 하는 위험 천만한 바퀴 달린 물건이었다. 그뿐이랴, 때로는 보도블록에 마구 올라와서 보행자들을 위협하고 흙탕물도 튀기기도 하며 비행청소년들이 밤놀이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이렇게 오토바이에 대해 편협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나는 남편에게 곧 애를 낳으면 모터바이크를 탈 시간도 없을 것이고 위험 천만한 기기이기에 잘못되면 어떡하냐, 독일에서 미망인이 되기 싫다, 등등 온갖 비극적인 시나리오를 펼치며 모터바이크를 팔아버리라 강력 주장했다. 남편 스스로도 1년간 집 앞에 세워 놓고도 탈 시간을 찾지 못하게 되자 (그러니까 나의 단독 범죄는 아니다) 백기를 들고 드디어 애마를 팔았다.
독일에서 모터바이크를 타는 취미를 가진 사람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꽤 많고 그들 대부분은 철저하게 안전 규칙을 지키며 타기 때문에 모터바이크는 특별히 위험한 취미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중에 아주 나아~중에 알게 되었다. 주변의 친구들이나 이웃들과 담소를 나누면서 남편에게 모터바이크를 팔게 했다고 말하면 '남자에게 모터바이크를 팔라는 것은 애를 팔라고 하는 것과 같다'며 어찌 그랬냐 입을 모아 나의 만행을 기린다. 없애라고 설득하는 과정이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큰 반박하지 않았기에 애마를 파는 일이 그토록 가심 찢어지는 일인지 그때는 몰랐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남편에게 많이 미안했다 (그러나 알았다고 해서 결과가 크게 다르지는 않았으리라).
이 두 가지 나의 만행에 대해 그 후로 오랜동안 잘근잘근 복수(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를 당했다. 남편은 내가 긴장을 놓고 있을 때마다 그동안 보여주지 않았던 찐 모습을 가지가지 앵글로 보임으로써 내게 앙갚음을 해 나갔다. 그 중 하나가 정기적 (?)으로 새로운 기계를 사모으는 것이다.
기계를 매우 사랑하는 우리 집 아저씨는 절대 아무거나 사지는 않지만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등장하면 그것을 집안에 꼭 들여야 한다. 비싼 것을 살 형편은 못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싼 것을 사지도 않는다. 결론, 기계를 자주 사고 싼 것을 사지 않는다.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사들이는데 남편이 기~일게 고민하는 과정 초기에 '이게 왜 필요하냐'라고 반기를 들다가 인내심 없는 나는 오래 고민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는 것에 지쳐서 제풀에 지쳐 나중이 되면 ‘차라리 사버려라, 고민하는 것을 보는 것이 더 지친다' 며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새로운 기계들이 우리 집에 들어오는 메커니즘이다.
예전에 블루레이 DVD 플레이어를 사겠다고 했을 때 처음에 나는 '무신넘의 블루레이 플레이어냐 그냥 DVD 플레이어도 화질이 좋기만 한데‘하고 반대했다. 그런더 어느 날부터 일주일에 걸쳐 블루레이 플레이어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식탁에서 조곤조곤 시작, 장황하게 펼치기 시작했다. 남편이 좋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니까 예의상 들어줘야 하니 듣고 있었는데 사이비 종교에 빠지듯이 별안간 나도 흥미가 생겨버린다.아니, 블루레이 플레이어가 꼭 필요한 물건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지면서 나도 모르게 블루레이 플레이어를 사러 가는 남편과 동행하게 되었다. 이걸 왜 사냐고 펄펄 뛰다가 홂닥 말려들어서 물건을 들어주러 같이 전자상가에 가는 것이다. 백지장도 마주 들면 힘이 되기에…
어느 날 거실 탁자의 먼지를 털다가 깜짝 놀랐다. 리모컨이 7개... 애플 티브이, 블루레이 DVD 플레이어, 사운드 시스템, 3D 비머, 이름도 모르고 기능도 모르겠는 가지가지 블랙박스들을 움직이는 또 다른 리모컨들…그리고 마지막 것은 이 모든 리모컨을 하나로 합치는 기능을 하는 리모컨이다.
초연결 첨단 가전의 미래가 펼쳐졌지만 남편은 한 가지 기능을 가진 기기가 제 기능을 더 잘한다는 고릿적 믿음을 버리지 못한다. 혹은 그 믿음은 그냥 핑계이고 여러 명의 마누라를 가질 수 없으니 대신 여러 개의 기계와 리모컨들에 줄줄이 둘러싸여 삶의 즐거움을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넷플 드라마의 여러 남주들과 사랑에 빠졌다 나왔다 하며 살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