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시장 레이아웃

크리스마스 마켓 준비

by 문맹

11월의 독일 날씨는 정말 정 떨어진다. 아니 겨울 전체가 그렇다. 하루종일 회백색의 우중충한 하늘이 계속되다 다섯 시만 되면 홀라당 캄캄해져 바로 잠자리로 기어들어가야만 할 것 같다. 나이 들면서 이 우울한 겨울을 보내기가 점점 힘들어지는데 또래 친구들을 만나면 숨겨 놓은 코카인이라도 있으면 좀 내놓으라 서로 너스레를 떤다.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니면서 좋아하던 술도 확 줄였고 매일 아침 마시던 커피조차도 특별한 날에만 마신다. 건강에 좋다는 생강차나 갈아 마시니 삶에 흥이 잘 돋지 않아서 그런가, 음울한 독일의 겨울은 슬로비디오처럼 답답하고 지루하게 흘러간다. 게다가 독일 중부의 겨울은 시도 때도 없이 눈대신 비를 뿌려대니 도저히 애정할 수가 없다. 오늘도 하루 두 차례 비를 뿌렸는데 한 차례는 제대로 맞고 들어왔다. 해바라기 샤워기 안개분사 정도의 비 뿌림이라 많이 젓지는 않았지만 또 속았다는 마음에 분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웬일로 해가 쨍! 우산 들고 갈까 말까 하다 설마 하고 놓고 나갔더니 웬걸? 시내 중간쯤에 다다랐을 때 맑은 하늘에 부슬부슬 비를 뿌리기 시작하더니 해가 들어갔다 나왔다 크리스마스트리 전구 같은 깜짝쇼를 몇 번하고는 본격적으로 비를 뿌렸다. 이건 또 무신 날씨냐, 약 오르게... 20년을 독일에서 살아도 꾸준히 3분 햇살에 속고 사는 나를 보고 우리 집 아저씨는 출신 문화의 힘(한국인은 태양의 후예?)을 볼 수 있다며 비웃는다. 왜 아직도 잠시 슬쩍 비추는 야속하게 짧은 햇살에 속는가. 곧 비가 올 텐데... 오늘 하루라도 해가 나주길 바라는 마음이겠다. 간절한 바람은 이성 위에 군림한다.


이렇게 축축하고 음산한 계절에 나를, 아니 전 독일 거주자를 살리는 구원의 빛이 있으니 바로 크리스마스 마켓이다. 쇼핑을 안 좋아해도 글루와인을 마시는데 관심이 없어도 이 계절에 크리스마스 마켓 구경을 다니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을씨년스러운 독일 겨울의 한줄기 빛이다. 셀 수 없이 쏟아지는 빛발, 화려한 장식, 다양한 먹거리와 볼거리로 많은 사람에게 즐거움과 따뜻함을 선사하는 명물 대잔치이다. 2023년 내가 사는 뒤셀도르프에서는 11월 23일에 개장하여 해의 마지막 전날인 12월 30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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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마켓이 열기까지는 2주 넘게 남았지만 뒤셀도르프 시내는 시장을 열기 위한 준비로 분주하다. 워낙 철저하고 계획성이 강해서 일찍 준비를 시작하기도 하지만 일을 후딱 해내지 못해서 그렇기도 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독일의 공사작업은 한국보다 훨씬 오래 걸린다. 일단 한국과 같은 위계사회에서는 윗사람이 무리한 지시를 하더라도 아랫 직원들은 지시에 복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여 대부분의 경우 불가능도 가능하게 만들어 낸다. 그러다 보니 공사도 몇 날 몇 시까지 끝내야 한다고 윗사람이 지시하면 그리 이루어질 수 있다. 독일에서는 윗사람이 무리한 지시를 하지도 못하거니와, 그런다 한들 고분고분 따르는 아랫사람들도 없다. 때려치우고 다른데 가면 그만이다. 10년 전에 우리 집 앞에 다섯 개 동의 새로운 아파트가 들어서는데 꼬박 7년이 걸렸다. 한국 아파트 업채였으면 7개월이면 끝냈고 중국이었으면 7일이면 올렸을 규모이다. 7년 동안 먼지 먹어 가면서 아파트가 지어지는 과정을 길 건너에서 (눈으로만) 감독했는데 진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저리 오래 걸리는가... 남편을 위시한 주변의 수많은 독일인들에게 물었다. 대체 공사는 언제 끝나는가? 다들 어깨만 들썩일 뿐 납득 할 만한 답변을 주지 못한다. 누가 알간? 여러 가지 답변 중 하나는 지진 때문이는 것인데 독일은 지진으로 대재앙을 겪는 나라는 아니지만 지진위험 국가이다. 그래서 건물을 올릴 때 항상 지진대비책을 세우고 지반다짐을 해야 하기 때문에 오래 걸린단다. 흥칫뽕이다. 지진대비책까지 세운다 하더라도 한국은 토목, 건축 공사에 이렇게 하세월이 걸리지 않는다. 내 생각에는 필요한 일꾼을 제때 찾지 못해서 그렇기도 하고 관찰결과 오후 4시만 되면 연장 딱 놓고 다들 퇴근하니 그렇다. 보수받는 시간만 일하고 깔끔하게 뒷짐 지고 집에 가는 문화! 멋지긴 한데 아파트는 언제 세우나? 또한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면 알 수 있다. '빠릿빠릿'은 우리 문화에나 있는 것이지 여기서는 그 어딜 찾아봐도 행동이 날랜 사람이 없다. 효율적으로 일하지 못한 다는 말은 아니다. 이들의 효율성은 우리와 질이 다르다. 독일과 한국 축구경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축구못알이지만 눈은 있기에 경기는 볼 수 있는데 독일 선수들은 어슬렁거리다 골을 넣는 것처럼 보이고 그에 비해 한국 선수들은 그라운드를 발 빠르게 누리면서 경기를 한다.


2주 전부터 크리스마스 부스가 세워지는 이유 중 하나가 혹시 시민들에게 주머니 점검을 할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닌가도 싶다. 크리스마스 날 가족의 선물을 사기 위한 비용, 겨울휴가 비용, 연말연시에 사람들과 만나는 각종 파티를 계획하고 그때까지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먹고 마시고 쇼핑하는데 얼마나 들 것인가를 계산해 보는 준비 기간? 그렇게 연말 형편을 좀 살피라고 2주에 걸쳐 도시 안에 작은 도시를 꾸미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놀지 말고 막판에 바짝 일해서 마켓이 열리면 지갑을 열어 열심히 소비하라고.


시민들의 정서적 보금자리를 만드는 작업이기도 하고 소비심리를 활성화하여 경제적으로 큰 효과를 내는 이벤트이기에 신경 써서 준비하기도 하지만 혹시 모를 테러에 맞서기 위해서도 만발의 준비를 한다. 2016년 크리스마스 시장에 트럭이 돌진해서 쇼핑하는 손님 12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48명의 사람이 부상당한 베를린 테러 (Anschlag auf den Berliner Weihnachtsmarkt an der Gedächtniskirche)를 시작으로 매해 테러리스트의 협박이 끊이지 않는다. 2018년 스트라스부르그 크리스마스 마켓에서도 무차별적인 총기난사 테러가 났으며 2022년 내가 사는 뒤셀도르프에도 테러위협이 있어서 마켓이 일시적으로 폐쇄되기도 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의연한 모습을 보이려고 애썼다. 테러리스트들의 목적은 사람들을 공포에 빠트리는 것이고 그 어떤 테러도 자유롭고 여유 있는 삶을 해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정부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시민들은 침착하고 냉정하게 대응하며 일상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이러한 침착함과 냉정함이 부러웠다. 부끄럽지만 나는 테러 위협이 있던 해에 크리스마스 마켓의 발치도 가지 않았고 우리 아이들도 못 나가게 막았다. 민주시민의 용감함을 장착하기에 나는 비겁하다. 즐겁게 크리스마스 마켓에 놀러 갔다가 불의의 사고로 내 아이들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지난 이태원 참사 때 나는 한글학교 교사 콘퍼런스에 강의차 런던에 있었다. 강의가 끝난 늦은 저녁 호텔방에서 티브이를 틀었다가 기가막혀 한동안 서서 벌벌 떨었다. 영국 BBC에는 온통 이태원 사고 이야기였다. 놀라서 핸드폰을 켰더니 사방팔방에서 날아온 다급한 문자로 와쓰앱 채팅방이 난리다 - 너희 나라에서 엄청 큰 사고가 났다는데 너희 가족과 지인들은 괜찮냐... 애도한다... 전세계에서 한동안 연락 안하던 친구들까지...애도 문자 메시지가 쌓여있었다. 그날처럼 처참하고 외로웠던 날이 없었던 것 같다. 런던 호텔 침대 끝에 걸쳐 앉아서 덜덜 떨리는 손에서 TV 리모컨을 놓지 못하고 격앙된 BBC 아나운서가 다급하게 전하는 우리 젊은이들의 속절없는 죽음을 낯선 땅에서 마주했던 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그 날... 독일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마켓을 준비하듯이 행사 2주 전부터 차근차근 계획해서 준비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온 거리를 다 막고 시민들을 겁나게 불편하게 만들더라도 얼마나 많은 인파가 몰릴 것인지 어떤 위험이 있을 수 있는지 사전에 파악되었다면, 당일 충분한 경찰력이 동원되었다면 갑작스러운 테러위협도 아니고 막을 수 있는 사고였을 것이다.


올해도 크리스마스 마켓은 트럭이 돌진하지 못하게 철저하게 바리케이드를 쳐 놓고 부스를 세우느라 바쁠 것이다. 베를린의 경우 33억 가량을 투입해서 크리스마스 마켓 주변에 테라 블록이라 부르는 쇠창살 격자 안에 모래, 돌, 콘크리트로 채워진 가방을 넣어 40톤 무게의 트럭이 덮쳐도 끄떡없게 설계된 전대미문의 보호장비를 설치했다. 크리스마스 마켓에 놀러 가는 시민의 안전을 위해 33억을 들여 보호장비를 설치하는 나라도 있는데 애들 술 먹으러 놀러갔다가 사고가 났는데 왜 우리가 애도해야 하냐는 내 나라를 생각하면 슬프고 또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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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두 주만 기다리면 고급스러운 상점 건물벽 아래 오종종하게 모여있는 정겨운 나무 부스들에서 연기가 폴폴 나면서 달콤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할 것이다. 나처럼 지갑이 얄팍한 사람들도 그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벌컥벌컥 지갑을 열어젖혀가며 한겨울을 보내기 위한 본격적인 칼로리 축적(? 사실 지금도 차고 넘치지만)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작년과 같은 위치로 가게들이 들어설까 궁금하다. 작년에 단골로 찾았던 두 개의 가게는 글루바인 부스와 바로 이웃한 라클래트 부스였다. 친구와 아침(!) 10시부터 만나 먼저 글루바인 한잔을 빈속에 털어 넣고 산타 할머니처럼 벌겋게 상기된 뺨으로 바로 옆가게에서 기차화통 삶아먹은 자신있는 목소리로 마늘치즈를 바로 녹여서 바게트에 올려주는 라클래트를 주문해 (뒤늦은) 안주로 섭취하는 루틴을 만들었다. 겨우내내 일주일에 한 번씩 조조음주를 즐겼었다. 아... 너무 알콜 중독자 같지만, 찐행복이었다. 일탈은 신나는 경험이다!


몇 년 전만 해도 크리스마스 마켓은 이렇게 깔맞춤 흰색의 고급스러운 모습이 아니었다. 부스의 크기는 일정했지만 일괄적으로 흰 집으로 바뀐 지는 몇 년 안 되었다. 뒤셀도르프 시내가 어마어마하게 현대화되면서 그와 걸맞은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진화한 것인데 전통 마켓까지 닥친 젠트리피케이션에는 호불호가 갈린다. 나는 현대적 디자인의 크리스마스 마켓이 더 좋은데 주변 친구들 중에는 더욱 옹기종기한 느낌이 있었던 오래된 통나무집 같았던 예전의 모델이 더 좋았다는 의견도 많다.


시내 중심에 열리는 마켓은 이렇게 현대화되고 규모도 크지만 그 외에도 뒤셀도르프 곳곳에 작은 규모의 동네 마켓은 아직도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도보로 20분씩 동서남북으로 걸으면 분위기가 조금씩 다른 동네 크리스마스 마켓에 다다를 수 있다. 매일 같은 곳을 가지 않아도 동네 여기저기에서 한잔씩 하면서 조금씩 다른 분위기를 즐기면 되니 6주 내내 지겨울 리 없다.


가장 화려한 시내 중심의 마켓에는 아이스 링크가 함께 있는데 친구, 연인, 가족 단위로 모여와 함께 스케이트를 타고 주변의 먹거리를 즐긴다. 나는 한 번도 타본 적이 없지만 우리 애들은 학교에서 여러번 단체로 다녀왔다. 학교 수업 빼먹고 반전체가 즐기는 스케이트, 꿀잼이리라!


오늘 시내에 나와보니 아이스링크 세팅도 다 끝났다. 관광객들은 물론이고 일상의 지난함을 타파할 만발의 준비가 되있는 나를 위시한 동네주민들까지 낮술, 혼술, 뭘 해도 용서가 되는 이 성탄시장에서 크리스마스가 오기까지, 올해를 또 무사히 넘김을 감사하는 날이 올때까지 뻔질하게 마실 수 있는 면죄부를 부여받는다. 자 한번 땡겨보자 올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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