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상대성
말년병장이 달력에 자신의 전역 날짜를 표시해 놓고 하루하루 야무지게 지워가면서 사회복귀를 꿈꾸는 것처럼 독일 사람들은 어드벤트 캘린더 (대림절 달력)를 11월부터 준비해 놓고 크리스마스를 기다린다. 어드벤트 캘린더에는 25개의 번호가 매겨진 작은 문이 있어서 12월 1일부터 시작해서 25일까지 하루에 한 개, 날짜에 해당하는 문을 열어 미리 준비된 작은 즐거움을 만끽해 가면서 성탄까지 기다길 수 있도록 제작된, 혹은 직접 만들기도 하는 달력이다. 처음 이 달력의 존재에 대해 알았을 때 나는 적쟎이 당황했다.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받는 것도 모자라서 12월 1일부터 매일 작은 선물을 받는다고? 독일 사람들에게 12월은 그냥 선물로 탕진하는 달이고 특히 아이들에게 12월은 내내 크리스마스로구나. 이렇게 까지 서로 선물을 주고받아야 하나... 하지만 20년을 어드벤트 캘린더를 장만해서 하루하루 선물을 열어 가며 크리스마스까지 기다리는 것을 이 을씨년스러운 겨울의 구원자쯤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다 보니 이젠 나도 이 시스템에 스며들어서 응당 필요한 것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독일에서 어드벤트 캘린더 준비는 어른 아이할 것 없다. 서로를 위해 준비하기도 하고 본인을 위해 스스로 장만하기도 한다. 오늘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어드벤트 캘린더 준비가 잘 되어 가냐 물었더니 엄마가 매년 만들어 주신다는 학생도 있고, 자기 것은 직접 살 것이라는 학생, 이미 집에 구해 놓았다는 학생도 있었다. 준비 방법은 스물다섯 개의 주머니나 상자를 준비해서 직접 초콜릿이나 과자를 구워서 채우거나 아니면 작은 선물을 사다 넣거나 또는 기성품 캘린더를 구입한다. 직접 달력을 제작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내용물을 무엇으로 채우냐는 설문의 답변을 보니 초콜릿이 67%로 명실공히 1위의 자리를 차지했고, 그다음으로는 사탕 (33%), 화장품 및 뷰티상품 (21%), 액세서리 (16%), 데코 아이템 (14%), 차, 맥주 등 음료 (14%), 장난감, 보석,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담은 쪽지, 수공예 제품, 현금이나 상품권들이 뒤따랐다 (2023년 통계자료 사이트 Statista 참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어드벤트 캘린더를 정성스럽게 준비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지만 나 같은 게으름뱅이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일이다. 크리스마스 선물 하나를 고르는 것도 골치 아파서 남편과 결혼초부터 생일, 기념일 등에 서로 선물하지 말자 약속했는데 어찌 스물다섯 개의 선물을 준비하랴. 사실 선물 준비가 애초부터 싫었다기보다는 남편이 자꾸 본인이 가지고 싶은 것을 나에게 선물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정하게 된 규칙이다. 우리 집 아저씨는 생일, 밸런타인데이, 크리스마스 등 선물을 주고받을 구실이 생길 때마다 별로 바꾸고 싶지 않던 나의 핸드폰을 몇 번이나 새것으로 바꾸어 주었다. 나에게 핸드폰 선물을 해준 후 신나는 사람은 본인이다. 언박싱하는 것 옆에 앉아 구경하고, 나 대신 새로운 기능을 섭렵해 핸드폰 화면을 싸악 새로 큐레이팅해서 나름 자기식으로 꿀물을 빨고 나면 그 부담스러운 핸드폰은 내 것이 돼버린다. 본인이 기계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 나도 좋아할 것이라 믿는 상상력의 부재에서 온 결과이기에 세차게 불평하거나 야단칠 수는 없지만 전화받고 메시지와 이메일 기능을 사용하는 것 외에 내게 거의 벽돌장 취급받는 핸드폰을 자꾸 바꿔주려는 것을 막아야 했다. 사실 핸드폰만이 문제가 아니라 나는 워낙 물욕이 없다. 집안에 물건이 많으면 청소할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지고 어서 물건들을 눈앞에서 없애버려야겠다는 생각부터 든다. 깔끔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게을러서 그렇다. 그냥 아무것도 없는 집에서 절간처럼 살고 싶다. 그래서 급기야 우리 사이의 선물교환을 일체 중단하자 선언했다. 선물 주고받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 집 아저씨는 매우 섭섭했겠으나 곧 꼬랑지를 내리고 수락했다. 물론 가벼운 먹거리 등을 선물로 주고받는 것은 언제나 환영이다. 뱃속으로 소비가 가능한 것은 눈에 거슬리지 않기에... 이렇게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게으른 나 때문에 불쌍한 남편은 애들에게 선물 받는 것으로 텅 빈 마음을 달랜다. 보고 있는 내 마음이 애잔해질 정도로 매번 애들에게 선물 받을 때마다 너무나 좋아한다. 이럴 때 꺾여서 다시 선물교환을 시작하면 또 새로운 핸드폰이 생길지 모르기에 참아야 한다, 암요! 가끔 남편은 로맨틱함과 담쌓은 나를 보며 '뭐 때문에 너를 좋아했는지 모른다'라고 매우 뒤늦은 자문을 한다. 콩깍지의 힘이지 뭘, 대신 웃겨주잖아!
게으름뱅이인 나와는 다르게 정성스럽게 어드벤트 캘린더를 준비하는 사람들도 많다. 작년 크리스마스에 나의 친구는 남편을 위해 25가지 다른 종류의 캔맥주를 온 동네 가게를 쏘다니면서 준비했다. 미처 구하지 못한 브랜드의 맥주까지 인터넷으로 꼼꼼하게 찾아 주문하던 그녀의 정성을 보면서 남편을 향한 내 사랑과 정성은 얼마나 말라 붙어버렸는가 깊이 반성했다. 게다가 그녀는 두 딸을 위해서 온 동네 문구점과 액세서리가게를 며칠간 투어 하면서 부지런히 선물을 준비하고 공들여 여러 종류의 과자를 구워냈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이렇게 정성으로 탄생시킨 어드밴트 달력을 아침마다 열어보면서 감탄하고 좋아하는 애들의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행복할까. 퇴근하고 저녁마다 종류가 다른 맥주를 한 캔 씩 마셔가며 어둑하고 피곤한 하루를 마무리하는 남편은 얼마나 행복할까. 그동안 어드벤트 달력을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침식당한 사람들의 광란이라고만 생각한 나는 부끄러워졌다. 모두가 나처럼 사는 것은 아니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해 주고자 애쓰는 사람들의 근면성을 귀차니즘에 빠져 질투했었나 보다. 쇼핑은커녕 무엇을 살 지 아이디어를 낼 여유도 없이 사는 나는 어드밴트 달력의 상업성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함부로 나불댔었다. 그리고는 그 친구에게 진심을 다해 고백했다. 다음 세상에서는 니 남편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이렇게 정성을 다해서 달력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11월을 쇼핑으로 탕진하도록 디자인된 현실에 속절없이 쓸려 다니는 사람들도 많다. 사랑과 나눔의 크리스마스 정신과는 거리가 멀게 점점 더 많은 종류의 어드벤트 캘린더 기성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월초에 벌써 온갖 슈퍼마켓, 백화점, 온라인 쇼핑몰에 이르는 모든 종류의 소매업체에서는 달력을 파느라 난리다. 기성품 달력은 25개의 제품을 하나로 묶어 덩이로 판매함으로 고객이 더 많은 지출을 할 수밖에 없도록, 필요하지 않은 것을 무수히 사들이도록 하는 고도의 판매전략이면서 미묘한 방법의 마케팅이다. 화장품의 경우 사은품 크기의 제품 25개를 달력에 욱여넣어 팔아 크리스마스 시즌이 끝나면 그것을 사용해 본 고객이 제대로 된 크기의 물건을 구매하도록 유도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상품판매 전략을 크리스마스뿐 아닌 졸업식 등의 다른 기념일이나 생일 등의 특별한 날까지 확대하는 제품들이 속속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생일 선물을 받게 될 그날까지 미리 준비된 작은 선물박스를 매일 열어가면서 기다린다는 새로운 개념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이 캘린더 선물의 가격은 10유로부터 시작해서 수백 유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중세에는 귀족들이 사치품에 돈을 흥청망청 쓰고, 농노들은 힘겹고 검소하게 살았는데 오늘날에는 오히려 부자들은 조심스레 소비하고 투자하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소비의 노예가 되어 계속해서 괴이하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물건을 사도록 강요받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 안타깝다. 꾸물꾸물한 날씨에 야외에서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없게 된 평범한 사람들은 쇼핑이라는 소일거리를 만들어 끊임없이 백화점으로 상점으로 온라인 플랫폼으로 들락날락을 반복하면서 가족, 배우자, 자녀, 친구 등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쁘게 해 준다는 명목으로 돈 많고 머리 좋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쇼핑 축제에 기쁜 마음으로 희생양이 되어 주는 11월이 야속하다. 어드벤트 캘린더는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즐거움을 배가 시키는 경험이라지만 이 마저도 우리는 돈으로 사고 있지 않은가.
기업들은 점점 더 창의적이 되어가 캘린더의 종류는 초콜릿, 젤리뿐 아닌 와인, 메이크업, 잼, 육포, 보석, 애완동물 간식, 양말, 피부관리제품, 핫소스, 양초, 티백, 헤어 제품, 보석, 장난감, 치즈, 커피까지 점점 더 다양해지고 있다. 심지어 온라인 가상달력까지 나와 매일 새로운 수수께끼를 풀거나 새로운 게임을 경험하고 노래까지 다운로드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참, 없는 게 없는 세상이다. 이러한 쇼핑 축제 희생자의 일원으로 그동안 내가 아이들에게 매년 사주었던 어드밴트 캘린더의 발전을 기록하면 이러하다.
아이들이 유치원생이었을 때: 쵸코렛, 캔디, 하리보 등 평소에는 착한 일 했을 때 상으로 받는 단것으로 가득 채운 달력을 사주었었다.
초등학교 때: 장난감들을 좋아할 시기이니 플래이모빌, 레고, 플레이 도우 등의 달력이 인기다. 저학년 때에는 크리스마스 관련 아이템이 들어있는 중성적 장난감을 좋아했다가 고학년이 되어가면서 아들은 스타워즈, 마블 등의 테마로 이루어진 장난감을, 딸은 레고 프렌즈로 발전했다. 요즘은 그 종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아져서 미니카 시리즈로부터 해서 해리포터를 비롯 슈퍼마리오, 포켓몬 등 인기 있는 캐릭터 상품들이 부쩍 더 늘었다.
중 고등학교에 가면서: 딸의 관심사는 화장품으로 진화하여 매 해 야무지게 미리미리 검색해서 원하는 달력을 콕 집어 요청했다. 반면에 아들은 어드밴트 칼랜더에 대한 관심을 상실했지만 안 받기는 억울한지 '엄마가 알아서 골라달라'는 가장 어려운 주문을 했다. 작년에 가지고 싶은 것은 없지만 안 받기는 싫은 아들을 위해 여기저기 남아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달력을 검색하다가 '무슬리 어드벤트 달력'을 우연히 찾았다. 아니 내가 찾았다기보다 알고리즘이 미친 듯이 클릭하던 나를 위해 흔쾌히 찾아주었다. 좀 비싸긴 했지만 먹을 것이기에 죄책감 없이 질렀다. 일단 그것으로 아침끼니가 해결되고, 아침마다 자신의 캘린더를 열어보며 즐거워하는 딸내미 옆에서 빈손으로 섭섭해할 아들을 생각하니 짠한 마음이 들어 사주었는데 웬걸, 나의 상상과는 달리 크리스마스가 오기까지 12월 한 달 내내 아들과 딸은 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아침식사를 한 적이 거의 없었고 아침마다 즐겁게 작은 상자를 여는 동생을 보며 오빠가 질투심을 느끼고 섭섭해할까 했던 걱정했던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아들은 매일 다른 맛의 무슬리를 신나게 꺼내 먹다가 초콜릿 무슬리가 나올 때마다 (초콜릿을 안 먹겠다 다짐했기에) 나에게 먹으라 넘겼다. 그 바람에 그 해 겨울 애꿎은 나의 몸무게만 가속증가했다.
준 성인: 대학에 가서 독립한 아들은 이제 어드밴트 칼랜더 같은 것은 필요 없단다. 차라리 그 선물비용을 크리스마스에 보태달라 지긋이 암시한다. 생활비가 빠듯한 녀석은 아마도 쓸모없는 25개의 선물보다 현금이 아쉬운 것이겠다. 고 3인 딸은 아직까지 12월 매일 아침의 짜릿함을 포기하지 못하고 오늘도 무슨 달력을 나에게 받아낼 것인가 핸드폰에 코를 박고 열심히 고르고 있다. (아들에게는 큰돈이 나가고 딸은 조용하고 티 안 나게 햄스터처럼 내 지갑을 야금야금 갉아먹는다.) 이렇게 아들과는 간단한 협상을 통해 어드벤트 달력을 사는 것에 종지부를 찍었지만 딸내미의 어드밴트 달력의 단가는 매 해 상승 중이다. 어서 그녀가 자라서 산업전선에 뛰어들어 내돈내산 어드벤트 달력을 장만하길 바란다. 그날이 와야 나는 이 자본주의의 폐단에서 해방이 될지이다.
물건이 소중했던, 그래서 선물이 소중했던 과거와는 달리 필요한 것은 돈만(?) 있으면 (없어서 문제지) 뭐든지 구할 수 있는 작금의 세상에 어드밴트 달력도 크리스마스 선물도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가도 거뭇거뭇한 겨울 하늘을 보면 생각이 바뀐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이 우울한 겨울을 견뎌내야 하는데 작은 선물을 준비하고 기대하는 마음이 생활에서 큰 응원이 될 테니 말이다. 이 전통은 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궁금해서 찾아보니 19세기 경 독일 개신교도들이 매일 촛불을 태워가면서 혹은 분필로 문이나 벽에 선을 긋는 방식으로 대림절을 기념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목재로 달력을 직접 수제작 했고 1851년의 것이 가장 최초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달력 이외에도 크리스마스까지 24일 동안 조금씩 태울 수 있는 크리스마스 양초도 있다. 가족 구성원마다 매일 선물을 뜯느라 난리 치는 것보다 식구가 함께 둘러앉아 양초를 태우는 것이 가볍고 부담 없는 의식이겠지만 온 가족이 함께 같은 시간에 식사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바쁘고 분화되어 뿔뿔이가 된 현대가족의 삶에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우리 집부터가 나의 출근과 애들 등교 시간이 맞지 않아 함께 아침식사를 할 수가 없고 (나는 아침 6시 30분에 이미 집을 나서고 애들은 7시에 일어난다) 주중에는 온 식구가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일도 없다. 양초를 태우며 하루를 함께 되돌아보고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기는커녕 방방마다 이부자리에 박혀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풍경이 더 자연스럽다. 가끔 티브이에 나오는 모범가정들을 보면 아이들이 청소년이라 하여도 아빠가 퇴근 후 모두 함께 모여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것이 무진장 부러웠는데 우리 집은 저녁마다 운동하기를 고집하는 아들(지금은 독립해서 집에 없기도 하고)과 야밤에 홀로 쿠킹쇼를 해가며 정찬을 해 먹는 딸내미 때문에 일찍 먹고 치워야 하는 늙은 부모들 먼저 저녁을 해결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촛불로 된 어드벤트 캘린더는 우리 집에 오면 장식품이 될 확률이 크다.
최초로 인쇄된 어드벤트 캘랜더는 게르하르트 랑(Gerhard Lang)이라는 출판업자가 1900년대 초에 삽화가인 언스트 캐플러 (Ernst Kepler)와 함께 상업용으로 제작했고 1920년대에 문이 달린 달력이 나왔으며 초콜릿을 담은 달력은 1950년대 후반에 등장하였다. 이 초콜릿 어드벤트 달력은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손주들과 함께 개봉하는 사진이 발표되면서 미국 어드벤트 달력의 대중화에 촉발제가 되었고 그 후로 전 세계에 유행하게 되었는데 혁신의 바람을 타고 매 해 발전된 달력이 제작되면서 이제는 세계적인 현상이 되어 최근 몇 년간에는 한국에도 소개되었다. 이러한 혁신의 바람이 어디까지 가게 될지 모르겠지만 벌써 게임, 음악, 명상, 스토리, 비디오 등으로 된 온라인 달력까지 유행하는 것을 보면 곧 상상을 초월하는 달력이 나오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달력을 이용해서 날짜를 세면 과연 날짜가 더 빨리 갈까 더 늦게 갈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핵심을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바꾸면, 내가 생각하는 1초의 길이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1초의 길이는 다르다는 것이다. 데이트하는 남녀의 1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갈 것이고, 지옥불에 빠진 사람의 1분은 영겁과 같이 느껴질 터 똑같이 1분이라 명명된 시간에 대해 사람들이 느끼는 길이는 다 다르다. 생물의 시간 지각에는 어떤 환경에서 어떤 속도로 생활하고 있는지가 영향을 미치는 것 같이 사람에게도 시간의 길이는 매우 주관적이기에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에 따라 길어질 수도, 또 짧아질 수도 있다. 생물계에서 가장 뛰어난 시간 분해능력을 가진 것은 잠자리와 검정파리라는데 그들에게 우리의 움직임은 매우 느리게 보여 우리가 파리를 잡으려고 파리채를 손에 들 때 파리는 그 모습을 비웃으며 애초에 저 멀리 도망갈 수 있다. 이것은 같은 종, 즉 같은 인간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라 어떤 사람은 시간을 길게 느끼고 살며 어떤 사람에게 시간은 엄청 빨리 간다.
말년 병장이 달력에 전역의 날을 매일 표시하며 보내는 것은 아마 전역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행위일 것이고, 어드벤트 캘린더의 문을 매일 열어가면서 선물로 행복해하며 크리스마스에 다가가는 것은 그 기다림의 경험을 더욱 깊고 풍부하게 만들어 시간을 느리게 가도록 하는 행위일 것이다. 이미 경험해 본 반복된 일상만을 살아가면 12월 하루하루의 시간은 빨리 지나갈 것이요, 매일 새로운 경험을 하고 기억될 만한 일을 계획해서 하루를 새롭게 인지해서 기억으로 만든다면 상대적으로 시간은 느려질 것이다. 비 오고 우중충한 겨울하루를 빠르게 보내버릴 것인가 아니면 천천히 2023년이 지나감을 음미하면서 살아갈 것인가.
오늘은 다행히 엉뚱한 학생 덕에 매우 기억에 남는 날이 될 것 같다. 50명의 학생이 수강하는 한국어 쓰기 수업 시간에 10분 과제를 내주고 교실을 돌아다니며 학생들에게 피드백을 주고 질문에 답변해주고 있던 중에 조용히 생일초를 켜고 앉아있는 학생을 발견했다. 수업시간에 자신의 생일 초를 킨 학생…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하고 이 사차원의 아이를 어찌해야 하나 잠시 기막혀서 당황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른 학생들에게 물었다. 생일축하 노래를 한국어로 부를 줄 아냐고. 끙끙대면서 텍스트를 쓰고 있던 학생들 중 절반이 고개를 들어 누가 생일을 맞이하였을까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잔잔한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렀다. 내가 먼저 "생일축하합니다"하며 한 소절을 뽑았더니 학생들도 노래를 따라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생일초를 수업시간에 직접 킨 사차원의 학생은 기쁨이 만연한 미소로 아이패드의 팬을 들어 올려 우리의 생일노래 합창을 지휘했다. 내가 시켜놓고도 기막혔지만 즐거워하는 생일소녀, 낄낄대면서 박수까지 치는 학생들을 보며 그래 한 번쯤 이런 수업도 있을 수 있지 했다. 그리고는 하루 종일 잠시 잠깐씩 이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피식 웃음이 흘렀다.
2023년 11월 중순의 어느 날 수년간 대학 수업을 하면서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을 모두에게 선사해 준 엉뚱하고도 흥 넘치는 자축생일소녀에게 감사하면서 동시에 수업시간에 딴짓하는 학생에게 우욱하며
화가 치솓는 갱년기 분노를 잘 조절한 내가 기특했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가끔 이렇게 즐거운 놀람이 생겨 잔잔한 행복감을 느끼면서 깊고 진하게 올 한 해 달력을 잘 넘겼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