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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랑 Aug 12. 2020

산티아고 순례길 - 구름 속을 걷는 기분

6월 10일 - 폰세바돈(Foncebadón)

구름 속을 걷는다.
불안한 발 밑
앞이 보이지 않는다.
손을 내저어 구름을 쫒아보지만
하나 부질없는 짓이다.
눈 감고 길을 걷듯
손에 든 지팡이에 의지해
풀을 헤집고 나뭇가지를 밀쳐내며
구름 속을 걸어간다.
혹여 라도 길을 잃을까
서두르라는 바람의 등 떠밂을 받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발에 치이는 돌부리를 뒤로하고
구름 깊숙이 보이지 않는
내일로 걸어간다.


전날의 우려가 현실이 됐다.


저녁부터 시작된 비가 그치지 않는 상황. 우리는 반강제적으로 출발을 늦춰야 했다. 우비를 입고 중요한 물건들은 지퍼 백에 넣어 가방 깊숙이 넣어둔다. 고어텍스임에도 신발 목으로 빗물이 들어와 질펀하니 젖어가고 빗물이 안경을 때려 앞이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비는 오래지 않아 멈췄지만 곧이어 산을 가득 메운 안개가 우리를 맞이한다. 그저 가만히 걷는 것일 뿐인데 목덜미가 축축하게 젖고 안경에 맺힌 물을 닦아내기 바쁘다. 마치 구름 속을 걷는 기분이다.

비는 그쳤지만 자욱한 안개가 내려앉아 걷는 내내 구름 속을 걷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상황은 열악하기 그지없는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은 것은 왜일까?


예전에는 눈비가 내리는데도 등산을 가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위험하기도 하고 힘들기도 한 길을 굳이 걷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그 처지에 놓이니 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산길은 미끄럽고 가시거리가 짧아 앞이 잘 보이지 않아 한 걸음 내 딛는 것조차 조심스러운데, 저절로 흥이 올라간다. 감정적이 되어서 시를 써보기도 하고 실없이 웃게 된다.


안개를 헤치고 도착한 폰세바돈의 알베르게는 앞서 도착한 순례자들로 북적인다. 하나 뿐인 슈퍼(supermercado)에는 순례자들이 식재료를 사기 위해 줄을 서 있고, 바르(bar) 역시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는 순례자들이 가득하다. 모두 흠뻑 젖으며 걸었는데도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힘들었던만큼 휴식은 달콤하게 다가오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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