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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랑 Aug 14. 2020

산티아고 순례길 - 안녕, 철십자가

6월 11일 - 철십자가(La Cruz de Fierro)

철십자가(La Cruz de Fierro)에 도달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어제, 혹시나 오늘도 날씨가 흐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출발할 즈음 구름이 걷히면서 맑은 하늘이 우리를 반겼다.


그림 같은 풍경을 보면서 철십자가로 향하는 길. 멀리 보이는 철십자가에 반가움과 설렘이 가득하더니 도달하자 복잡 미묘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 고마움, 미안함, 걱정. 할머니와 동생의 건강과 행복, 우리 가족 모두의 행복과 안녕. 신혼여행의 무사한 마무리. 앞으로 살아갈 내일에 대한 기대와 걱정. 지금까지 살아온 어제의 참회와 용서.


가방의 주머니 한편을 자리 잡고 있었던 조약돌 네댓 개를 내려놓으면서(사는 곳의 돌을 가져와 철십자가에 내려놓음으로써 근심과 걱정을 내려놓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수많은 감정의 소용돌이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함께 걸어온 이름 모를 순례자의 위로를 받고 동행인의 토닥임을 받으면서도 멈추지 않던 눈물. 가슴을 짓누르던 미안함, 감사함, 그리움, 서운함, 걱정, 기대 모두 조금씩 내려놓고 나서야 겨우 눈물이 멈추었다.

고작 조약돌 몇 개 내려놓은 것일 뿐인데. 왠지 모르게 배낭의 무게도 가벼워진 것 같다. 아마도 한결 가벼워진 마음의 무게 때문이 아닐까?


철십자가는 내게 내려놓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다.


한없이 욕심을 부리고 다 내 것이기를, 상대방의 사랑하는 마음도 오로지 나만을 향하길 얼마나 갈구하고 헛된 욕심을 부렸던가.


나는 사소한 것 하나에도 욕심을 부렸고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상처 받고 화를 내기 일쑤였다. 어리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가를 알면서도 바뀌지 않는 것은 잘못과 반성의 반복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성장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하린(Macjarín)의 알베르게. 전기나 샤워시설 없이 잠자리만 제공한다. 이곳엔 세계 각 나라까지의 거리를 적어둔 팻말들이 걸려있다. 태극기도 보인다.

그런 나로 하여금 수많은 욕심을 내려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게 만든다. 내게 철십자가는 그런 곳인 듯하다.


남편은 어떤 생각으로 철십자가를 대했을까? 어떤 기도를 하고 어떤 것을 내려놓았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알고 싶기도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니 말해주기까지는 일부러 물어보지 않기로 한다.


나만이 알고 싶은, 간직하고 싶은, 알려주고 싶지 않은 그런 것이 있을 테니까.


기도한다.


지금까지 너무나 아프고 힘들었던 많은 시간들은 뒤로하고 행복한 날들만 가득하기를. 우리 가족 모두에게 더 이상 아픈 눈물은 없이 즐거이 웃을 수 있는 내일만 펼쳐지기를.

또한 지금까지 했던 실수를 더 이상 반복하지 않기를.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던 일들 이제는 하지 않기를. 사소한 것에도 감사하고 소중히 여기며 베풀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철십자가를 마주한 나는 내가 얼마나 작고 보잘것없으며 실수투성이의 모자란 사람인가를 깨닫고 조금은 성장한 인간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기약 없는 이별.


후에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다음에는 참회의 눈물, 근심의 눈물, 미안함의 눈물이 아닌 감사의 눈물, 반가움의 눈물, 행복의 눈물이 넘쳐흐르기를 바라본다.


안녕, 철십자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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