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타는 아마도 외부요인
3.
C병원은 병원 중에서는 대기업에 속하는 편이라 고객센터에서 전화문의를 받고 있다.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어 안내음성에 따라 번호를 눌러 상담원을 연결하는 식이다. 물론 초고속 인터넷이 발달한 대한민국의 병원 답게 인터넷 예약도 가능하다. 그런데 병원 첫 방문은 생리 이틀 째여야 한다길래 일찌감치 날짜를 잡을 수는 없었다. 뭐 이것저것 검사를 해야 해서 생리 이틀 째가 아닌 날 방문해봤자 다시 생리 날짜에 맞춰 병원을 가야했다. KTX 비용과 시간을 생각하면 시키는 대로 둘째날 가는 게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다만 문제는 미리 예약을 잡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생리가 규칙적이라고 한들 시작 예정일을 정확히 맞추기란 어려웠다. 하루이틀 정도의 오차는 늘 발생하곤 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실제로 생리를 하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5월이었다.
예상대로라면 5월 생리는 토요일이나 일요일 즈음 할 것 같았다. 주말에는 고객센터도 쉬는지라 금요일에 미리 전화로 문의를 했다.
저어, 병원에 처음 가는데요, 생리를 토요일에 시작하면 일요일이 이틀 째인데 병원에 월요일에 가도 상관 없나요?
네. 월요일에 오셔서 진료 보시면 됩니다.
K교수님한테 진료를 보고 싶은데, 예약을 안 하고 가도 당일진료 받을 수 있나요?
네. 협진 교수님에게 진료 보시고 다음 예약부터 K교수님 진료로 잡으시면 됩니다.
첫 진료라 남편은 비뇨기과 진료를 봐야 한다는데, 인터넷으로 예약 잡으면 될까요?
네.
생리를 토요일에 시작하든 일요일에 시작하든 병원은 월요일에 가야 하므로 일단 남편의 비뇨기과 진료를 인터넷으로 예약했다. 비뇨기과 진료는 간단한 문진과 검사뿐이라 의사를 고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아침 일찍 KTX를 탈 예정이라 진료는 9시로 아침 일찍. KTX 티켓도 예매했다. 그리고 일요일, 생리를 시작했다.
아침 5시 30분 차를 탔다. 오랜만에 맡는 새벽 공기는 상쾌하고 싱그러웠다. 여행 가는 기분이 나기도 했다. 이른 비행기를 타러 가지 않는 이상, 이렇게 아침 일찍 일어날 일은 거의 없었으니까. 하지만 때는 코로나로 전세계가 패닉에 빠지던 시기였다.
애초에 올해는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의 미국 투어를 가기로 되어 있었다. 뉴욕, 2번의 공연이었다. 투어 티켓도 비행기 표도 숙소도 모두 예약을 끝내놓은 상태였다. 15년만의 뉴욕이었다. 그때는 잘 몰라서 못 봤던 마크 로스코의 그림도 열심히 보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오리라 생각했었다. 21세기 유례없는 전염병이 돌아 모든 게 취소되기 전까지는.
미국에 갔다와서 병원을 가보려고 했었다. 계획보다 한두 달 정도 이른 방문이었다. 가슴 한켠으로는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어차피 아무 데도 못 가고 아무 것도 못하게 되었다. 여행은 물론이고 일도 많이 취소됐다. 공연 관련 일은 모두 취소되거나 기약없이 미뤄졌다. 출간하기로 했던 책의 담당 편집자는 권고사직을 당했다. 잡혀있던 수업들도 한없이 미뤄지거나 없던 일이 되었다. 문화예술 관련 일이라는 게 다 그렇다. 여유가 있어야 문화나 예술에 비로소 눈길이 가는 것이다. 게다가 사람이 모이는 게 가장 위험한 시기이기도 했다. 아이가 생기면 몇 년은 돌아다니지 못하고 집에만 붙잡혀 살아야 될 테니까, 차라리 좋은 시기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묵혀놨던 ‘병원 가기’ 미션은 그렇게 성사되었다. 중국발 바이러스에 등이 떠밀려. 우습게도 말이다.
병원에 도착한 것은 7시 30분 즈음이었다. 붉은 벽돌 건물 2층에 위치한 C병원은 ‘최첨단 의료시설’이라는 분위기가 잔뜩 느껴졌다. 2층 에스컬레이터를 올라와 병원 입구로 향하는 길에는 유리창 너머로 냉동난자, 정자, 배아 등이 보관되고 있다는 커다란 스틸 용기 같은 것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어 SF 분위기마저 풍겼다.
8시 반부터 진료가 시작되기 때문에 로비는 한산했다. 아직 진료 시간 전이라 그런지 다섯 개의 접수처에 접수원은 한 명뿐이었다.
처음 왔는데, K교수님 진료를 받고 싶은데요.
예약하셨나요?
아뇨. 생리를 언제 시작할지 몰라서. 전화로 물어봤더니 협진 교수님으로 당일 접수하라고 하던데요.
저희는 협진 같은 게 없는데요.
네?
대기업 이미지에 걸맞지 않게 불친절한 접수원은 상담 내용을 무시하고 다른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딘가 전화를 걸고 확인을 하더니 교수님이 봐주겠다며 일단 예약자 우선이니 기다리라고 했다.
8시 반이 다 되자 조용하던 로비는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난임 부부가 많았나 싶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출근하기 전 들르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았다. 외국인도 있었다. 이게 K-난임시술의 힘인가?
기다리는 동안 남편은 비뇨기과에서 검사를 받았다. 비뇨기과 진료는 금방 끝났다. 정자 검사를 위한 정액 채취, 간단한 문진. 이어지는 기다림의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예약을 해도 2시간 대기는 기본이라는 후기를 보고 와서인지 몰라도.
앉아서 기다리면서도 여전히 망설여졌다. 어차피 난임 시술을 받을 거라면 인공수정보다 바로 시험관을 하는 게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한다면 시험관 시술을 할 예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벽같이 일어나 2시간 가량 KTX를 타고 와서 한없이 기다리며 앉아있는 와중에도, 일말의 망설임이 마음 속 한구석에 있는 것이었다. 정말 잘 할 수 있을까? 내가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지금도 행복한데 왜 굳이 사서 고생을 하려는 걸까?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이윽고 차례가 왔다. 10시 30분 정도 됐으니 이곳에 도착해서 진료까지 3시간 가량 걸린 셈이다.
결혼한지는 얼마나 됐어요?
10년 됐습니다.
오늘부터 바로 채취 들어가죠.
으..음? 네, 네.
거두절미하고 K교수님은 바로 시험관 시술을 들어가자고 했다. 뭔지 잘 모를 전문용어가 쏟아졌고 주사약 놓는 법이랑 뭘 알려줄테니 잠깐 나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그렇게 또 등이 떠밀려 갑작스레 시험관 시술을 시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