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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멘트 Oct 01. 2023

모든 것이 실망스러울 때는..

수많은 좌절과 실망을 먼저 겪었던 이들에게 받는 위로

길고 힘든 한 주였다. 남미 사람들과 일을 하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힘이 들지 않았던 적은 없었으나, 올해는 유난히 더 지난했다. 이들의 시간개념은 우리의 그것과 너무나 다르다는 것쯤은 이미 많은 이들이 아는 명백한 사실이지만 (예를 들면, 이들이 'Perfecto, te respondo mañana.'라고 했을 때 이를 문자 그대로 읽으면 '완벽하네요, 내일 회신드리겠습니다.'라고 번역되지만 실생활에서 이 말은 '일단은 알겠고, 기회가 되면 회신을 드려보도록 할게요. 물론, 회신을 꼭 드린다는 말은 아닙니다.'정도로 해석하면 딱 맞다.) 정말이지 이 인간들, 해도 해도 너무하다. 


작년 말부터 시작한 한 프로젝트가 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개인적으로도, 회사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서 Plan B, C, D, E까지 준비하며 끌고 온 일이었기에 Plan A가 어그러지더라도 그 수많은 백업플랜들 중에 어느 하나는 성공해야 했고,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이 일이 처음에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까다로운 일이었고, 모든 일이 그렇듯 군데군데 예상치 못했던 지뢰 같은 장애물들이 숨어있었으며, 여기에서 결정적인 한방은 남미사람들 특유의 무개념, 무상식, 무책임한 태도가 극에 달했다는 이었다. (한 문화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한 것일 뿐, 남미사람들 전체를 욕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대면 미팅을 포함한 모든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동원해 거의 1년 가까이를 협업해 왔는데 하루아침에 딴소리를 하지 않나, 업무적으로 중요한 일정들을 바꾸고, 또 바꾸면서도 미안하다는 내색도 없고, 업무의 시급성이나 중요성과는 별개로 어떨 때는 그냥 한두 달씩 잠수를 타버려서 온 업무가 완전히 마비가 된 적도 있었다. 과정이 이러다 보니 될 일도 안될 판이었다. 그리고 이번주에 또다시 황당한 소리를 해대는 담당자와 한참을 이야기하고 난 뒤, 나는 마치 해탈에 이른 수도승처럼 마음속에서 정신없이 일어나던 동요가 차분히 가라앉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화가 났고, 만약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무엇을 다르게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은 자기반성과 자책에 이르렀다. 그런데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내가 크게 무언가를 다르게 할 수 있는 일은 크게 없을 것 같았다. 자만심에서가 아니라, 돌이켜보면 매 순간 고민해서 결정했고, 대안을 찾아가며 열심히 했으니까. 일은 늘 그렇듯 나의 바람과는 다른 결과가 종종 나타나기도 하지만 문제는 사람들에게 받은 실망감이었다. 아무리 '그저 일'이라고 한다 해도 상대편에서 조금만 더 상식적인 선에서 관심을 갖고, 안된다는 생각보다는 된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갖고 있었다면 결과는 분명히 달랐을 것이고, 심지어 결과가 같았다고 해도 서로가 좋은 마음으로 합심해 최선을 다했던 일에는 결과에 대한 미련을 넘어 우정 혹은 동지애 비슷한 감정이 굳게 자리 잡는 법이다. 한 회사의 대표에게는 결과만이 중요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일을 하는 실무자 입장에서는 결코 결과만이 중요할 수는 없다. 우리는 결과와는 상관없이 당장 내일부터 다시 일을 지속해 나갈 힘을 얻을 곳이 필요하니까. 그리고 그 힘은 일이 아닌, 사람에게서 나오니까. 

어느 흐린 밤, 애증의 산티아고

2천 년 전 거대했던 로마제국의 16대 황제이자 철학자였던 Marcus Aurelius는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있는 <명상록>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만일 현재의 모든 일을 성실히, 명료히, 친절하게 올바른 이치에 따라 수행한다면, 그리고 부차적인 것에 산만해지지 않고 정신을 온전하고 안정되게 유지하고 특별한 기대나 그렇다고 회피하려는 마음도 갖지 않고 그 일에 참여하며 그저 현재의 그 일이 자연의 섭리와 일치함에 만족하며 당신의 말과 표현이 진정한 로마의 정직함으로 전달된다면, 당신은 좋은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그렇게 하는 데 방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성실하고 명료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해야 할 일을 하며 그 일이 자연의 섭리 안에서 수행됨을 그저 만족하라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이 와닿는다.


로마제국 황제이자 스토아학파 철학자 Marcus Aurelius (121~180년)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 또한 친절함에 대해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듯하다. 그는 저서 <지혜의 달력>에서 이렇게 말했다.  

친절함은 우리 인생을 윤택하게 한다. 친절함은 미스테리한 것들을 명확하게 하고, 어려운 것들을 쉽게 만들며, 지루한 것들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 어떤 것도 끊임없는 친절함만큼 우리의 삶과 타인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없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말 그렇다. 타인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도 잘 못하는 일이긴 하지만, 내가 먼저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다가가면 상대도 마음을 열고, 그렇게 열린 마음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   

 

여기에서 인용된 각 세가지의 책들

미국의 현대 시인이자 수필가인 Ross Gay는 자신의 정원에서 당근을 수확하며 짧지만 아름다운 단상을 이렇게 남겼다. 

'kind'는 '종류'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당근의 친절함(눈 건강에 좋고 맛이 있는 등의 특징)은 '친절함(kindness)'과 '친척(kin)'이 동일한 어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아마도 우리가 친절하게 대하는 대상은 넓은 범위에서 우리의 친척이 될 수도 있겠죠. 심지어 우리가 친절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들까지도요. 그리고 그 범위는 생각보다 매우 큽니다.

나로부터 시작된 작은 친절이 결국 퍼지고 퍼져서,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또 세계적인 기술문화 전문잡지 Wired를 창간 및 편집장을 지냈던 케빈 켈리도 그의 한 저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옳은 것과 친절함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때는 늘 친절하기를 택하세요. 예외는 없습니다. 친절함과 약함을 혼동하지 마세요.  


주변 모든 이들에게, 특히 나에게 적대적인 이들에게 친절하기란 쉽지 않다. 다음주가 되면 다시 이 실망스러운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런 상대방을 대하며 자연스럽게 발생되는 나의 감정인 좌절감과 분노, 신경질적인 반응 등은 이 상황을 조금도 개선시킬 수 없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내게 유일하게 남은 선택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함뿐 이라는 것을 수많은 현인들이 말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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